예민하고 불안한 아이들

선택적 함구증

by atree




교습소를 운영하는 동안 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두 명의 '선택적 함구증'인 아이들을 만났다. 둘 다 여자아이다. 첫 번째 만난 은솔이는 초등학교 2학년, 현지는 6학년. 공통점은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는 것과 학원을 꽤 오래 다니다가 그만둘 때가 다 돼서야 한두 마디씩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족끼리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고 은솔이는 집에서 오히려 까불이 수다쟁이인데 집 밖에서는 말하지 않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고 했다. 그저 학교나 학원에서 숫기가 없고 조용한 편인 정도겠거니 여기는 것 같았다.




미술학원 초반엔 도무지 입을 떼지 않아서 스무고개 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물어보면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의사소통했다. 같은 반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수업 시간에 발표해야 하는데도 말을 안 해서 선생님께 혼났다고 하고 유치원 때도 선생님께도 아이들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었다. 은솔이는 유치원도 졸업할 때가 다 돼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는데 선생님이고 아이들이고 어지간히 놀랐다고 한다.


“우와~~ 은솔이가 말한다~~!!”


“선생님, 은솔이가 말을 했어요~~~~”


은솔이는 5학년 언니와 같이 다녔는데 언니는 동생처럼 입을 아예 닫지는 않았지만, 말이 많지도 않았다. 할 말은 했고 이따금 동생 대신 말을 해 주기도 했다. 자매의 어머님은 은솔이의 침묵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들어볼 얘기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별문제가 없었다. 말로 표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었지만 그림에서는 표현하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았으며 미술 활동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쯤 만난 현지는 6학년이었는데 이 아이도 같은 반 아이의 말을 들으니 역시나 학교에서 말을 안 한다고 했다. 발표 시간에도 말을 안 해서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다고 했다. 물론 본인이 한 말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가 해 준 말이다. 나는 오래전에 은솔이를 경험해 봤기 때문에 아, 이 친구도 선택적 함구증이구나 바로 알아챘다. 또다시 스무고개가 시작됐다. 이건 어떻니, 저건 어떻니, 이렇게 해 볼래, 저렇게 해 볼래, 괜찮겠니? 하는 식으로 의사를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소통했다. 그림을 곧잘 그렸고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놀이미술 시간을 꽤 즐겼다. 현지도 본인이 미술활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수업 진행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말로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빼면.




내가 현지의 의사를 묻고 답을 꼭 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현지는 쭈뼛거리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피했다. 불안한 듯한 몸짓에도 말을 해보려는 듯이 입술을 오물거리기도 하고 삐죽거리기도 했다. 가만 보면 말은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때론 내가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현지야! 말 좀 속 시원히 해다오!!”


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려니 속이 터졌다. 그러나 본인은 또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인가.




‘선택적 함구증’은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증상이며 여자아이 중에 많고 유병율은 매우 낮다고 한다. 그 흔하지 않은 경우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러 미술학원에 다닐 확률 또한 높지는 않을 텐데 난 두 번을 만났다. 이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다행이라 생각됐다. 말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사는 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울까. 그림으로라도 자기표현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일종의 해방이나 탈출구가 될 수 있을 법하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표현의 자유는 얻을 수 있고 말은 안 하고 있어도 되니 부담도 없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다른 아이들과 굳이 대화가 필요 없다. 어쩌면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어울리지 못해 소외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학원에서는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한 공간에서 같이 있으니 뭔가 소속감을 느낄 수도 있고 오히려 그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현지 집으로 전화할 일이 있었는데 어떤 여자아이가 받았다. 목소리 톤이 높고 어쩐지 도전적인 말투에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누구지? 현지네 가족 구성원은 아빠, 오빠, 할머니뿐일 텐데? 몇 마디 하다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현지였던 것이다?


'선생님,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그동안 전혀 몰랐죠? 제가 원래는 말을 이렇게나 잘할 줄 알아요. 이번 기회에 잘 알아 두시라고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아이는 평소 하지 못했던 말에 대한 분이라도 풀 듯이 속사포처럼 말을 해댔다. 어느 누구하고 말싸움이 붙어도 밀리지 않을 만한 기세였다. 나는 몹시 놀랐지만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아마 누가 봤다면 표정 관리는 안 되었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현지의 빠른 말투와 도전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눈만 껌벅거렸다.


“아니….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대체?”


다음 수업 시간엔 예의 그 입을 꼭 다문 현지를 다시 만났다. 서로 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그 통화에 대해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건드리지 않는 게 나을 듯해서였는데 어쩌면 그때 ‘너 정말 말 잘하더라’ 고 얘기를 건네는 게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놀이 미술 수업 중에 자기 얼굴을 다시 표현해 보는 수업이 있다. 아이들 얼굴 사진을 찍어서 A4용지에 프린트하고 그 위에 투명한 OHP 필름을 붙여 준다. 그 위에 유성펜과 매직펜,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그려보고 채색하는 활동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얼굴 위에 또 다른 자기 얼굴을 그리게 되는데 완성되고 나면 참 재미있는 그림들이 나온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수업이 아이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 아이가 이 수업 땐 아주 개성 있는 도깨비 같은 얼굴을 그린다거나 내성적인 아이가 아주 발랄하고 화려한 얼굴을 그리기도 한다. 말 없고 무뚝뚝한 남자아이가 만화 캐릭터 같은 엉뚱한 얼굴을 그리거나 똘똘하고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순둥순둥한 얼굴을 그리는 등의 이면을 보여준다.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아하, 네 안에는 이런 친구가 들어 있구나 하고 혼자 웃는다. 그 재미있는 그림들을 공개하고 싶지만, 초상권 및 저작권상 공개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아쉽다.




현지는 이 수업에서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는데 이 아이의 자기 얼굴 다시 표현하기는 평소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수업이 평소와 다른 아이들의 숨은 내면을 엿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현지가 그렇게나 다른 얼굴을 그려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현지는 누가 봐도 얌전하고 소심해 보이는 표정에 평범하기도 한 인상을 가졌다. 전형적으로 여리고 가녀린 소녀상이다. 그런데 얼굴 사진 위 투명 필름 위에는 제법 매서운 인상의 얼굴을 그려 놓았다. 눈썹은 한껏 위로 올라가고 눈매는 날카로우며 입술은 새빨갛다, 도발적이다. 쉬워 보이지 않는 표정인데 예의 그 전화 통화할 때의 말투, 목소리와는 부합하는 느낌이다. 현지야, 너 때문에 선생님이 자꾸 놀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이 놀이 미술을 통해 한 길 속의 반의반의 반길 정도는 엿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현지도 은솔이처럼 학원을 오래 다닌 시점에서는 나에게 몇 마디 정도는 말했다. 뭔가 불안한 듯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우물쭈물 입 밖으로 어렵사리 소리를 냈다. 본인이 먼저 말을 한 것은 아니고 묻는 말에 짧은 대답 정도의 말이었지만 그래도 그만큼이 어딘가. 선택적 함구증은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불안’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많은 연예인이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그 기저도 불안이다. 불안으로부터 생기는 병증은 다양하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인 영하는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었고 본인이 즐겼고 또 굉장히 예민한 아이였다. 이 아이는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기 전이면 선생님인 나를 들들 볶아댔다. 수업을 하다가 내가 왜 이렇게 힘이 들고 피곤한 걸까 생각해 보면 영하가 앉아 있었다.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느끼는 불안감을, 선생님을 볶아대면서 푸는 것이다. 내가 너덜너덜해질 때쯤이면 영하는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실마리가 풀린다. 그리고 그리기 시작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누구보다 집중해서 그리곤 했다. 영하가 수업하고 가면 열 명의 아이를 동시에 수업한 정도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뭔가를 시작할 때 불안 정도가 커지는 아이였는데 실은 나 역시도 그렇다. 작업할 당시 공모전이 다가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짜증을 짜증을…. 나도 시작이 힘든 타입이라 영하의 어려움을 잘 안다. 영하는 잘하고 싶은데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을 것이다.




나는 공황발작을 딱 한 번 경험해 봤는데 입시 미술을 할 때였다. 학원에서 실기 시험을 보는데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고 그런 만큼 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 시험 시간은 네 시간으로 정해져 있고 세 시간 두 시간 줄어들수록 숨 쉬는 게 힘들어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건너편에 앉은 친구의 샴푸 냄새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와 바늘처럼 꽂혔다.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샴푸 냄새는 점점 더 짙어지면서 콕콕 들어와 박히니 호흡은 더욱 얕아지고 가빠져 몹시 불편하고 괴로웠다. 그림을 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숨 쉬는 게 고통스러우니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공포가 그 시간을 압도했다. 입시가 끝나자 그런 발작은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때 그 경험 때문인지 나는 눈앞의 시간을 다퉈서 해야 하는 일에 많이 취약하다. 봅슬레이나 스켈레톤 같은 정말 미친 속도의 경기를 보다 보면 '흑' 하는 짧은 시동이 걸리면서 눈물이 찔끔 난다. 그, 시간을 뚫어버릴 듯 맹렬한 속도로 폭풍처럼 거칠게 질주하는 치열함이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너무나 무겁고 느려진 내 삶과 대조되어 그런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선택적 함구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표현을 얻고 자유를 느끼고 즐길 수 있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이럴 때 미술활동은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의미한 활동이 된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업을 그만둔 후 그림에 손조차 댈 수 없다. 그럼, 뭐 어떤가.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는데. 그럼 됐다. 글을 쓰면서 불안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표현의 자유를 얻는 일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표현을 하고 그로써 자유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또는 그 어떤 표현을 했든 자유로왔으면 된 것이다. 나는 길을 잃지 않도록 걸음마다 불안을 떨구면서 모로 가는 서울에 가고 있는 중이다. 불안을 피해 가는 길을 잘 찾아갈 수 있길 바란다. 내가 만났던 두 명의 아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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