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배우지 않는 것들에 관한 tip
엄마표 미술을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아이가 어떤 감흥이 떠올랐을 때 바로 표현해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손 닿는 곳, 거실 한 부분이나 놀이방에 테이블을 마련하고 기본적인 재료들을 상시 마련해 놓는다면 미술을 즐기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뭔가 그려보고 싶은데 종이는 여기서 찾아야 하고 색연필은 저기서 찾아야 하고 바닥에 또 뭘 깔아야만 하고 물감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되고. 이렇게 되면 그사이 쫓아오던 흥미도 도망가 버리고 만다. 감흥을 느끼고 그림으로 표현되는 과정은 바로바로 이어지는 게 좋다. 재료는 다양할수록 좋지만 흔한 과자 박스 뒤집어 입체로 다시 붙여서 이쪽 저쪽 그림만 그려봐도 재미있고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내 조카는 외국에서 태어났는데 동생에게 아이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대로 지지하고 존중해 주라고 당부를 해 두었다. 동생은 집에 IKEA에서 파는 두루마리 화지를 구비해 두었다고 했다. 조카가 대여섯 살 때쯤 야외로 놀러 갔다 온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을 가로 지르는 길이로 종이를 길게 끊더니 오면서 봤던 길의 풍경을 그리며 놀았다고 한다. 구불구불 길을 그려놓고 이쯤엔 뭐가 있었고 저쯤엔 뭐가 있었고 하면서.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참 기뻤다. 과연 내 조카로군. 조카는 네 살 때 가르쳐주지도 않은 오브제를 활용할 줄 알았다. 엄마를 그린 그림에 가슴의 bast point는 점토를 떼어 갖다 붙인 것이다. 입체감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을 그려서는 입체적인 느낌이 나지 않으니 클레이 점토를 갖다 붙인 것으로 해결한 듯했다. 그럼 초등학교 들어갈 때 한국으로 들어온 이 녀석은 한국 학교에 들어가서 그림을 잘 그렸을까?
2학년 때 이모 학원에 놀러 왔다가 동갑내기가 그린 사슴벌레를 보고 기가 죽은 나머지 붓을 꺾고 말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갑내기는 벌써 그림을 시작한 지 이 년이나 됐고 관찰화 수업을 즐기던 친구였다. 저는 아직도 자유로운 영혼의 유치부처럼 그리고 있던 터라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너는 어렸을 때 누구보다 표현을 잘할 줄 알았고 그 시기에 그런 과정을 가져 본 건 굉장히 중요하다. 너는 그 과정을 충분히 거쳤고 그건 나중에 해 보고 싶다고 해서 해 볼 수도 없는 거다. 관찰해서 그리는 그림은 연습하면 얼마든지 잘 그릴 수 있다고, 지금부터 하면 된다고 어르고 달랬지만 그 후로는 한동안 그림 그리는 걸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소질이 있어도 배우고 연습해서 익힌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차이는 벌어진다.
화지:
작은 메모지부터 B5, A4, A3, 8절 스케치북, 다양한 색깔의 색지, 색종이
드로잉 재료:
연필, 미술용 지우개, 컬러 볼펜, 수성 사인펜, 유성 네임편, 유성 매직펜, 돌돌이 색연필, 연필 색연필, 파스텔, 크레파스, 수채화 팔레트, 수채화 붓
그 외:
마른걸레(수채화 붓 물 조절용), 물통, 가위 등
**칼이나 글루건, 스테플러는 보호자가 있을 때만 사용하도록 한다.
일단 집에서는 위와 같이 기본적인 정도로 준비해 두면 적당하다. 이리저리 시도해 보며 궁리해 보는 과정은 필요하며 유익한 시간이 된다. 드로잉을 하기 위한 화지는 다양하게 구비하는 게 좋다. 그림을 그릴 때 주제를 정해서 그림을 완성 시킬 줄도 알아야 하지만 가벼운 드로잉으로 연습을 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작고 색깔 있는 종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오리고 붙이는 활동을 하기에도 좋다.
드로잉 재료는 심이 볼펜처럼 단단하고 가는 재료부터 크레파스처럼 무르고 두꺼운 재료까지 다양하게 준비한다. 연필도 그림 그릴 땐 흔히 4B연필을 사용한다고 알고 있지만 필압 조절이 잘 안되는 어린아이들에게 4B연필은 너무 진하고 또 번지고 지워도 자국이 남는다. 연필도 HB, B, 2B 정도 준비해 두면 좋고 지우개는 미술용 무른 지우개를 준비한다. 일반 지우개는 잘 지워지지도 않을뿐더러 종이에 여러 번 비비면 화지가 찢어진다. 여기에 물감까지 바르면 화지가 너덜너덜해진다. 학원 수업할 때 유치부야 연필 스케치 없이 색연필이나 사인펜으로 바로 드로잉하기도 하지만 초등부부터는(개인 차에 따라 다르다) 연필 스케치를 하고 나서 채색했다. 연필로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려보는 과정이 없으면 드로잉 연습이 되지 않는다. 연필 스케치가 끝나면 스케치가 보이는 정도가 되게끔 지우개로 살살 지우고 그 위에 채색했다. 연필 선이 진하면 색연필이나 사인펜 등과 겹쳐 만났을 때 색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물감을 사용할 경우엔 종이가 두꺼울수록 좋은데 유초등부 아이들이 연습용으로 쓰는 화지는 200g 정도면 적당하다. 보통 스케치북 겉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색연필은 깎아서 쓰는 연필 색연필, 플라스틱 돌돌이 색연필이 있다. 연필 색연필에도 색칠 후에 붓에 물을 묻혀서 붓질하면 수채화처럼 번지는 수채용 색연필이 있고 물에 번지지 않는 색연필이 있다. 돌돌이 색연필은 유성으로 물에 번지지 않고 연필 색연필보다 두껍다. 이 색연필의 두께는 손이 작은 어린아이들(유치부)이 쓰기엔 두껍고 길이도 길다. 나 같으면 어렸을 때 손에 쥐기 불편하다고 불평했을 것 같은데 그런 불평을 하는 아이들은 보지 못했다. 앙증맞은 손에 버겁게 쥔 색연필로 집중하느라 입술을 모으고 열심히 그리는 모습은 정말 귀엽다. 색연필 회사에서 아이들이 손에 쥐기에 두껍지 않고 기존보다 좀 살짝 짧은 돌돌이 색연필을 개발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있기는 있다. ‘Crayola’라고 짧은 길이의 미국 크레용인데 손에 묻어나지는 않는 반면 잘 부러지는 데다가 발색이 너무 흐리다. 양초에 물감 몇 방울 섞은 정도의 질감과 발색이라 별로다. 아이들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사인펜은 컬러 수성 사인펜과 컬러 유성 사인펜이 있고 좀 더 두꺼운 펜으로는 컬러 네임펜과 컬러 유성 매직펜이 있다. 볼펜은 모나미 12색 볼펜이 있었는데 단종됐다가 수년 전 귀환하더니 다시 사라졌다. 이 색 볼펜을 선호하는 아이들이 간혹 있었는데 표현과 드로잉이 좀 되는 아이들이다. 자세하게 그리고 싶은데 돌돌이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는 너무 두꺼워서 선이 겹치게 되므로 얇고 분명한 선을 쓸 수 있는 볼펜을 선호하는 것이다. 또 크레파스를 사용하지 않는 아이 중에는 손에 묻히는 걸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요즘은 시중에 손에 묻지 않는 크레파스가 나와 있다). 반대로 표현이 좀 부족하거나 해서 그릴 게 없고 화지가 허전해 보인다 싶으면 화지를 쉽게 채울 수 있고 금방 칠해지는 크레파스를 선호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주로 돌돌이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사용해서인지 학원에서는 크레파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항상 기본 재료를 모두 울려두고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했는데 크레파스를 쓰는 아이들은 없다시피 했다. 사인펜이나 유성 매직을 주로 사용하는 아이들은 사인펜이나 매직의 진하고 선명한 색감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읫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드로잉 재료가 다르다.
수채화는 두 종류가 있다. 투명 수채화와 불투명 수채화다. 투명 수채화의 관건은 물 조절이다. 아이들이 스케치는 잘해 놓고 물감으로 채색하다가 낭패감을 맛보는 경우가 많다. 물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화보다 더 어려운 게 수채화라고 할 수 있다. 유화는 색칠하다가 고쳐 보고 싶으면 물감이 마른 후에 수정할 수 있지만 수채화는 틀리면 수정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채색을 시작할 때 계획을 잘 짜야 하는 그림이다.
유치부 아이들도 물감으로 칠하는 걸 좋아하는데 물감이 섞이면서 다른 색깔로 변화하는 것에 꽤 흥미를 보인다. 이미 만들어진 색을 쓰는 것보다 색깔을 스스로 이색 저색 섞어 보게 하는 게 좋다. 한 가지 색을 기준으로 예를 들면 노란색+ 빨강, 노랑+파랑, 노랑+보라 등 다양한 색을 섞어보게 한다. 물감 양을 다르게 섞으면 명도 차이가 생기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물감을 갖고 놀다보면 자연스럽게 농도 조절을 할 수 있게 되고 명도 차이도 낼 수 있게 되면서 물감 채색에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평소에 쓰는 8절 스케치북이 아닌 4절지 크기의 종이에 넓고 큰 평붓으로도 칠하게 해 보고 둥근붓으로도 칠해보게 해도 좋다.
물 조절을 잘하기 위해서는 마른걸레가 필요하다. 스케치까지는 그럭저럭했는데 물감으로 색칠하다 보면 그림이 엉망이 되는 건 물 조절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둥근 붓에는 붓털과 붓대를 이어주는 부분이 있는데 비어 있다. 붓을 물에 담그면 이 부분으로 물이 들어가게 된다. 붓을 물에 빨고 걸레에 한 번 찍고 나서 물감을 묻히려는데 생각보다 물이 많이 나와 팔레트에서 붓에 물감을 묻혀 비벼주다 보면 의도한 색깔보다 색이 흐려진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걸레에 붓을 한 번 찍고 물감을 묻히는 동안 공간에 있던 물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붓을 빤 뒤 걸레에 찍을 때 공간에 있는 물이 빠져나올 때까지 붓을 걸레에 누른 채 조금 기다려야 한다. 내가 칠하려는 물감의 농도를 잘 조절하려면 바로 이 과정이 연습 돼야 한다. 내가 칠하려는 면적 대비 어느 정도의 물감을 붓에 묻혀야 하고 어느 정도의 물감과 물이 필요한지도, 이 과정에서 조절한다. 이 과정만 해결돼도 그림 상태가 아주 좋아진다.
수채화 물감은 팔레트에 짜서 단단하면서 꾸덕꾸덕한 정도로 굳혀서 쓴다. 짤 때는 팔레트 각각의 칸 양 앞에 비는 공간이 생기지 않게 빈틈없이 채운다. 물감 순서는 물감을 사서 뚜껑을 열었을 때 보이는 순서대로 짜면 무리가 없다. 물감을 새로 사서 보면 색 계열이 연결되게 배치되어 있다. 물감이 마르면서 수분이 날아가기 때문에 부피가 좀 줄어드는 걸 감안해서 양을 채운다. 팔레트를 오래 보관하다 한참 만에 찾아 들었는데 손에 뭔가 찐득한 게 묻고 물감은 바짝 말라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돼버리는 경우가 있다. 물감이 종이에 붙어 있게 만들어주는 접착제가 다 빠져나와서 물감 수명이 다 된 것이다. 이럴 땐 팔레트가 잠기도록 물에 담가서 물감을 녹인 후 칸 사이를 깨끗이 닦아 비우고 말린 뒤 다시 짜서 쓰면 된다.
투명 수채화 그림에 흰색 물감은 쓰지 않으므로 팔레트에 짜놓지 않는다. 사진과 같은 자리에 물감을 짜 놓으면 화이트와 블랙 밑의 색깔과 서로 섞이기 쉽다. 불투명 수채화를 할 때는 흰색 물감을 팔레트에 바로 짜서 쓴다. 불투명 수채화에서 흰색 물감은 상당한 양이 필요하므로 팔레트에 짜 놓는 정도로는 될 일이 아니기도 하다. 불투명 수채화는 평붓(털이 짧고 납작한 붓)에 물이 많지 않게 조절을 잘해야 불투명한 발색이 가능하다.
검은색은 보통 두세 가지(Viridian+Red or Viridian+Vandyke Brown+Russian Blue) 물감으로 만들어서 쓴다. 수채화 물감과 팔레트는 전문가용을 권한다. 문방구에서 파는 흰색의 작은 플라스틱 팔레트는 칸이 많이 나뉘어져 있어 오히려 사용하고 관리하기 불편하다. 어린이용 플라스틱 튜브에 들어있는 물감도 발색이 안 좋고, 탁해서 아무리 꼬맹이들 그림에라도 쓸만하지가 않다. 붓도 전문가용으로 한 두 개 쓰는 게 대형마트 등에서 파는 세트로 된 붓보다 낫다. 붓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비누칠로 빨아서 모양을 잡아 말린다. 붓털이 위로 가게 해서 털이 눌린 채 모양 잡히지 않게 보관한다.
물통은 너무 작은 것으로 쓰면 물이 금방 오염되므로 넉넉한 크기로 하는 게 좋다. 물이 더러우면 물감과 더러운 물이 섞여 채색이 탁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물은 자주 갈아줘서 붓이 탁해진 채로 색을 만들지 않도록 한다.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없으면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노는 창조적 능력이 있다. 집에 있는 사소한 것들로 이것저것 그리고 만들고 꾸미고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창의력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집에서 부모님과 아이가 같이 미술 활동을 하기 어렵고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이상 전문적인 지식도 실기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집에서는 학원에서 하는 만큼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기 쉽지 않기도 하고 또 엄마 껌딱지 동생이라도 있으면 곤란하다.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아이들과 같이 미술 활동을 해 보길 권한다. 이유는, 아이들이 유년기에 양육자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과 그 경험에서 받은 긍정적인 피드백은 서 말의 구슬이 되고 그 보이지 않는 정서적 자산은 훗날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가 저마다 알록달록 예쁜 구슬을 주머니에 넣어 뒀다가 힘들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꺼내 쓴다면 얼마나 멋진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