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ree Oct 04. 2024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네가?

누구나 두 얼굴을 가지고 산다


“너 애들 싫어하지 않았어??”

“너 옛날부터 애 안 낳겠다고 했었잖아”




내가 미술교습소를 시작했을 때 친구들 반응이 이랬다. 난 내 애를 안 낳고 싶다고 했지, 불특정 다수 어린이를 싫어한다고 말한 적 없다. 오히려 예뻐했는데? 노래방을 싫어한다고 노래 못 하리란 법 없고 클럽은 싫어하지만 춤은 혼자서 즐길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런데?


“야.... 너, 네 성질에 애들 다 배려 놓는 거 아니냐?”


아닌데? 1학년 여자아이한테 친구 엄마가 ‘너 다니는 미술학원 선생님 어떠시니’하고 물어보길래 ‘우리 미술 선생님은 아주 상냥하세요!’라고 말했다며 또박또박 말해 주던데?




좀 하다가 그만둘 줄 알았다는 친구의 예상과 다르게 나는 무려 꽉 찬 15년 동안 세 군데에서 교습소 운영을 했다. 두 번째 교습소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현아 어머님이 아쉽다고 그림을 같이 보자고 제안하셨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현아 어머님과는 평소 이야기를 많이 나누던 터라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현아와 현아 어머님, 셋이 함께 인사동에서 만나 여기저기 보며 다녔다. 봄이 한창이었고 날씨는 좋았다.




원생과 학원 외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또 새로운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학원과 학원 밖에서 사뭇 다르다. 학원 안에서는 그렇게 잘 따르고 생글거리며 말도 잘하는 아이들이 밖에서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 닭 보듯 무뚝뚝하거나 아예 모른 채 지나가기도 한다. 처음엔 황당하고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었나 마음이 쓰였는데 나한테만 그런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안도한 적이 있다.




오래전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유치원 선생님들한테 설문한 걸 맞추는 퀴즈가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을 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울 때는? 이라는 질문이었고 예시가 몇 가지 나왔는데 나는 쉽게 답을 맞힐 수 있었다. 내 예상대로 유치원 선생님들은 길에서 원아들을 만났는데 모른 척할 때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초등 남자아이들의 경우는 나와 대화할 때는 제법 능청스럽다가도 어머님이 학원에 방문하시면 갑자기 유치부 아이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어머님들과 얘기해 보면 또 어머님들은 아이들의 밖에서 모습을 전혀 모르고 계신 경우도 많았다. 어머머, 우리 애가요?? 하면서.





못 보던 갤러리가 있어 다가갔다. 입구 포스터의 그림이 처음 보는 그림인데도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전시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과 후배의 개인전이었다. 어떤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축하를 하고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인사동 나들이였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동엘 갔었던 것은 대학원 동기 A가 졸업 후 첫 번째 개인전을 할 때였다. 그날 A의 작품을 보고 충격과 상처받은 이후로 웬만해선 남이 하는 개인전엔 발걸음 하지 않았었다. A 대부분의 작품에는 내가 대학원 수업 때 발표했던 나의 새로운 기법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내가 그 기법을 처음 선보인 것은 대학원 크리틱 수업 때였다. 발표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가자, 옆자리의 A가 어떻게 하면 이런 기법이 나오는지 몸을 내게 기울이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원래 말투가 조용조용하니 얌전한 사람이었고 평소엔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옆에서 보면 답답한 구석도 있었다. 술이나 한잔 들어가야 겨우 조심스럽게 한마디 할 수 있는 소심한 성격 같았다. 목소리 큰 사람이 궁금해하면서 수선스럽게 물었으면 나도 좀 경계가 됐을 텐데 그날은 꿈도 유난히 좋은 꿈을 꾼 데다 작품에 대한 동기들의 반응도 기대 이상의 호평이었다. 한껏 좋아진 기분에 별생각 없이 설명해 줬다. 그런데 새로운 기법에 궁금해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자기 작품에 그대로 쓰고 개인전에 걸어 놓은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A가 이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에 더 충격이었다.





시장에 상도덕이 있듯이 작가들 사이에서도 남의 새로운 기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다. 떳떳하지는 못한 것이다. 최소한의 눈치라도 보는 게 맞다.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A의 표정과 태도에 나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뭐라고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가 쓴 기법은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 중 아무도 쓰지 않는 기법이었다. 내가 처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그 기법을 그대로 쓴 작품이 그날 내 눈앞에 있었다. A의 기법인인 양. 그 전시를 발표하고 축하하는 자리에 있던 나는 너무나 무력해진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그 부분에 대해서 A에게 아무 말도 안 한 데다가 뒤풀이까지 가서 앉아 있었으니, A의 작품을 인정해 준 꼴이 됐다. 이 바보짓은 두고두고 불면에 시달리는 밤이면 생각나서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후론 한동안 남의 개인전엔 문턱도 넘기 싫어져 버린 것이다. 내가 모자란 짓을 해 놓고 왜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개인전도 가기 싫어졌는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나도 싫었다. 개인전을 한 번도 못 해 보고 작업을 포기한 것과 상관없이 남이 하는 두 번째 세 번째 개인전을 축하하러 가는 일이 생긴다. 전시장 조명은 작품을 비추는데 내 눈엔 작품 유리에 비친 내가 보였고 그 모습은 유쾌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인사동 나들이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착잡했다. 그림을 다 보고 나가려는데 전시 주인공과 동기인 후배가 인사를 해왔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

“네,, 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이 후배는 눈이 점점 둥그레지더니 혼잣말처럼 알 수 없는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는데 요즘 말로 입틀막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후배가 계속 생각이 났다. 왜 그렇게 귀신 보고 놀란 얼굴을 한 거지. 다 들리게 중얼거리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 내가 작업을 안 해서 한동안 그 바닥에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건가? 아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데. 뭐지 도대체. 궁금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다가 어느 날 아하! 하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 때문에 나는 혼자 몇 번이나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후배 은경이라고 있다. 이 친구도 이 날의 개인전 주인공과 동기다. 무더운 여름 뜨거워진 머리를 좀 식혔다 가려고 학교 앞 은행엘 들렀는데 이 후배가 친구랑 같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는 얼굴들이니 인사를 건넸다. 둘 다 경계하는 표정으로 눈만 껌벅거렸다. 눈치 보듯 엉거주춤한 인사가 엉성하다. 얘네 왜 이러지. 애들이 좀 어리벙벙하네? 은경이와는 학부 졸업 후 나중에 친해지게 됐는데 어쩌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은경이는 보기완 달리 어리숙한 친구가 아니었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투 때문에 자기가 어리바리한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그런 선입견 때문에 득을 보기도 한다고 했다.


“언니, 근데 그거 알아? 언니 별명이 무서운 언니였어”

“그래서 예전에 은행에서 날 그렇게 쳐다본 거였어?”

“응”




혼자 작업실을 할 때 작업실 바로 밑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주로 생수를 사러 가곤 했었다. 가게에 들어서면 인사하고 물 집어 들고 돈만 내고 나오면 그만이니 몇 년씩 갔어도 스몰톡 따위를 나눌 일은 없었다. 하루는 주인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거기는 이쁜 아가씨가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요 그래”

“제가요??”

“내가 보면 올 때마다 얼굴이 굳어 있더라고 화난 사람처럼. 오늘은 얘기를 해 줄란다 하고 말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허허. 웃어요 웃어. 웃는 얼굴에 복이 혼다잖어”


생각지도 못한 얘기였다. 내 표정의 기본 값이 굳어 있는 인상인 줄 몰랐다. 물론 중〮고등학교 때 학년마다 2학기 말쯤 되면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듣던 말이 있기는 했다. 말 한마디 해 볼 일 없을 줄 알았다는. 그땐 그게 내 개성인 줄 알았다. 아무튼 이후로 그 가게에 갈 때만큼은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거 보라고.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며 좋아하셨다. 생각해 보면 고맙다.




후배 은경이 말에도 내심 놀랐다. 나는 후배들과 교류가 없었던 데다가 눈에 띄던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무섭거나 말거나 뜻밖에 내가 나름대로 존재감이 있는 선배였나 싶었다. 누가 그랬다. 무플보다는 악플이라고. 인사동에서의 궁금증은 이 ‘무서운 언니’ 한 단어로 답을 찾았다. 그날 내 옆에 현아 어머님과 현아가 있었고 따라서 나는 자동으로 학원 원장 모드 상태였던 것이다. 그 후배는 내가 가벼운 미소와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로 나긋하게 인사를 건네서 놀라버린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을 그녀 스스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서 더 웃음이 났다. 반쯤 벌어진 입을 막는 행동이 슬로모션이었던 게 특히 그랬다.





그렇게나 충격적이었을까. 그날 후배의 표정이 떠올라서 한 번 웃고 또 웃고.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렇게나 무서운 인상인 나를, 소심한 A는 그렇게 겁도 없이 베꼈었다니. 그런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빙다리 핫바지였다니. 그런 내 별명이 무서운 언니였다니. 이 무서운 언니를 학원 아이들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었다니.





누구나 두 얼굴을 가지고 산다.

그렇게들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이전 01화 선생님은 꿈이 뭐였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