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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tree Sep 27. 2024

선생님은 꿈이 뭐였어요?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될 것 아닌가



“선생님, 선생님은 꿈이 뭐였어요? 미술 선생님이었어요?”



올 것이 또 왔구나. 종종 듣는 질문이다. 또 다른 질문으로는 선생님은 몇 살인지를 묻기도 하는데 그럴 땐 '응, 선생님 스무 살이야'라고 허무맹랑한 숫자로 장난을 친다. 유치부 아이들은 '아~ 선생님 스무 살이구나! 우리 엄마는 삼십칠 살인데!'하고 넘어가곤 했다. 반면 초등 아이들의 이 ‘선생님은 꿈이 뭐였냐’는 질문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는 꿈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꿈이 뭐냐고 묻는 법은 없이 과거형으로 물어 오면 말문이 막혔다. 알 만한 거 다 아는 고학년 아이들이 궁금해할 때 특히 그랬는데 선생님은 처음엔 공간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가 나중엔 그림 작가가 되고 싶었단다. 동시에 교수도 되고 싶었어라고 말하면. 그럼 혹시라도 ‘선생님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학원 선생님이 된 거네’라고 생각할까 봐 내심 두려웠던 모양이다. 진실을 마주하는 건 용기가 꽤 필요한 법이니까.



학부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 사업이 망했다. 작업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내 욕심이 앞섰던 나는 작업실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엄마는 네가 작업을 계속해야겠다면 지속적인 수입원이 있어야 하는데 밑천을 마련해 줄 수 있을 때 미술학원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이 얘기를 들은 친구 릴라가 말했다.


‘미대 나와서 제일 안 풀린 애들이나 하는 게 미술학원이야.’


맞는 말 같았다. 엄마가 제시하신 액수는 꽤 컸으나 나는 내키지 않았다. 훗날 모친 말씀으로는 당시 내가 뭘 안다고 남을 가르치냐고 했다고 한다. 실은 미대 나와서 영 안 풀린 애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한 친구가 한 말의 영향력은 컸다.



신설이었던 우리 과 초기 졸업생들은, 졸업하고 한 십 년 정도 작업실에 코 박고 있다 보면 전국의 대학에도 차츰 동일 과가 생겨 한 자리씩 나지 않을까 하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대 망상으로 전락하고만 기대를 저마다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작업하면서 강단에 서고 싶었지, 글발 좀 풀던 배우 유아인의 말처럼 동네 상가에나 있는 학원 원장이 될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교수는커녕 전임이라도 그게 어디 뉘 집 개 이름이든가.



그래도 작업은 계속해 봐야겠고 작업실은 유지돼야 했다. 학부 졸업하자마자 작업실을 처음 얻었을 때 임대료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관리비 별도였다. 집이 망하기 전에 얻은 작업실이었다. 엄마한테 손 내밀면 나오는 돈 받아다 건물주에게 전달만 하면 됐었다. 이런 꿀통은 얼마 안 가 깨져버렸다. 마침 한 친구가 어린 사촌 동생 개인지도를 연결해 줘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지도, 그룹지도 등을 해서 생기는 수입은 재료를 사고 전시하고 작업실을 유지하는데 몽땅 들어갔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연한 거였으니까. 나를 꾸미거나 취미생활 같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다들 어떻게 하면 돈 안 드는 재료를 찾아서 작업을 하나 궁리하는 형편이니 우리끼리는 작업복 차림으로만 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다. 대부분 그랬다. 사회생활 하는 친구들을 만나도 아직 20대고 기반이 안 잡혔으니 큰 격차도 없을 때여서 별 위기감을 못 느꼈다. 한 친구는 예술은 원래 춥고 배고파야 정상이라고, 너 지금 제대로 하는 거라고 거들었다. 또 다른 회사 다니는 친구들은 우리는 남의 일을 하는 거지만 너는 네 일을 하는 것 아니냐. 그게 진짜 남는 거라고. 우리는 퇴직하면 그만이라고. 그 역시 당시엔 그럴듯하게 들렸다.



내 to do list에 결혼은 저 아래쯤에나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애는 낳지 않겠다고 노래를 불러서 그랬는지 더욱 관심 밖이었다. 작업과 결혼, 양자택일이라면 마땅히 작업이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전혀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작업을 계속할 수 있기를 열망했다. 한 번은 전시 뒤풀이 자리에서 술잔이 몇 차례 돌자, 당시 내 연애를 알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시집 안 가냐?”

“왜 자꾸 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한두 번은 듣고 말았는데 세 번째는 나도 한 마디 했다.


“갈 것 같은 애가 계속 보여서 그런다.”

“헤어졌다고요!”


딴엔 해 보겠다고 어렵사리 버티고 있는데 자꾸 저런 말씀을 하시니 서운하기도 하고 기분도 별로였다. 나는 정신 못 차리고 대학원 진학을 시도했지만 몇 번이나 실패했다. 그 중엔 단 한 명만 합격한 학기도 있었다.



작업실 월세는 해마다 2만 원씩 올랐고 60만 원까지는 버텼으나 62만 원은 턱 밑까지 차오른 물처럼 느껴졌다. 내 작업실엔 육중한 프레스기가 두 대나 있어서 이사가 수월치 않았지만 숨은 쉬어야 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기들과 공동 작업실을 꾸리기로 했다. 그래, 나만의 우주는 이제 없는 거다. 개인 작업실을 그만하기로 한 데 따른 거부반응인지 이마에는 전에 없이 커다란 왕 뾰루지가 몇 개나 올라왔다.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항상 몸에 이상이 생기곤 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스스로를 연민했다. 이사 날 아침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티슈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 뒀었는데 막상 짐을 다 빼고 나니 의외로 덤덤했다. 그래, 그동안 많이 울었지. 내 작은 우주야 이젠 안녕.



공동 작업실이라고는 하나 다섯 명의 인원이 동시에 쓰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나까지 두 명, 많아야 세 명 정도였으니 지낼만했다. 학교 근처에서 좀 떨어져 나오니 오다가다 불 켜져 있어서 들렀다는 지인들의 예고 없는 방문도 없었다. 작업실에 들어가는 비용은 이전 작업실의 반의반 정도였다. 내 작은 우주는 무슨 얼어 죽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비싼 작업실을 울며 짜며 그렇게 붙들고 있었는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경제 개념이 없던 탓이다.



아르바이트로 하던 그룹지도는 방문 수업이었는데 초인종을 누르고 문 앞에 서 있는 그 순간이 참 싫었다. 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해 본 경험도 없이 교습소를 차리기로 했다. 몇 년 전 엄마가 ‘마련해 줄 수 있을 때’라는 단서를 달았던 밑천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첫 교습소는 앞뒤로 몇 걸음 좌우로 몇 걸음 정도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층의 가운데 부분이었는데 옆 학원과 나눈 복도 쪽 자리라 밖으로 난 창문이 없었다. 복도로 난 창문은 하필 엘리베이터 앞이라 블라인드로 가려 놓아 이래저래 답답했다.



어차피 할 거 진작 했으면 규모 있게 시작해서 벌써 자리 잡았을 텐데.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기 마련이다. 간판을 걸고 일주일이 지나자, IMF가 발생했다. 나 같이 간이 콩만 한 위인이 그렇게 큰 경제위기가 코 앞에 닥친 줄 몰랐으니 벌일 수 있는 일이었다. 내 첫 교습소는 낮에도 항상 조명을 켜고 밖에 날씨가 어떤지도 모르는 채로 지냈다. 퇴근길에 예상치 못한 눈이라도 내리고 있으면 조금 서글펐고 여전히 작업은 포기를 못 하고 있었다.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교습소를 시작한 거였으니까.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이 쉬운 것은 또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 못지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괴로웠다. 이루기 위한 과정은 적어도 터널 끝 바늘구멍만 한 희망이라도 가져 볼 수 있는 반면 포기는 터널을 빠져나왔더니 절벽 밑으로 펼쳐진 어두운 협곡,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었다. 나를 내려놓고 그간 외면해 왔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대학원은 몇 번의 실패 후 교습소를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다시 도전했다.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하게 잊기 위해서. 이번에도 실패하면 다시는 미련 갖지 않기 위한. 뭐 많은 스토리들이 그렇듯이 나도 이 결정적인 도전은 또 성공하고 만다. 하, 이게 아닌데. 조교로 있던 후배가 일부러 전화해서 합격을 알려왔다. 내 지도 교수님은 ‘아니, 걔가 도대체 몇 번 만에 붙은 거야. 어?’라며 굳이 나의 장수 끝 합격을 강조하셨다고 한다. 이 교수님은 시험 전 학교 앞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나를 구석으로 몰았다.


“너 이번에 시험 보니”

“아니요.”

“왜”

“볼 만큼 봤잖아요”

“너 이번에 시험 꼭 봐, 어? 알았어?”


사실 지도 교수님과의 이 만남이 시험을 다시 보는데 좀 작용하기도 했다. 마치 나를 키워주기라도 하실 양인가 오해하기 쉬웠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았고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대학원 작업과 교습소를 병행하느라 선 채로 무릎이 꺾여 깜박 졸며 일할 때도 있었다. 당시 친구 릴라는 대학 시간 강의를 나가고 있었다. 학원은 미대 나와서 제일 안 풀린 애들이나 하는 거라던 친구의 말은 항상 내 마음 한편에 팔짱을 끼고 앉아 나를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릴라는 그즈음 결혼했는데 시아버지가 소유하신 부동산이 많았다. 저기 서울 외곽에 있는 공간을 내줄 테니 며느리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넓은 평수였다. 신이 난 그녀가 내게 말했다.


“미술학원 하려고 인테리어 알아보고 있거든, 너 수업계획안 만든 거 있잖아, 그것 좀 줄 수 있어?”

“뭐? 너 옛날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 안 나냐?!! “


릴라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종알거리며 얼버무려 웃을 뿐, 그녀가 던진 말 한마디에 스스로를 ‘안 풀린 자’로 규정하고 내내 위축되어 있던 나만 한심할 따름이었다. 릴라는 내가 배신감을 다 처리하기도 전에. 수업 계획안을 넘겨줄 일도 없이. 반년 만에 갈라섰다.



대학원 졸업 청구 전시를 해야 하는데 액자값이 아깝게 느껴졌다. 여태 작업하고 전시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아까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아, 나 이제 더 이상 작업 못 하겠구나’


공동 작업실은 같이 쓰던 언니가 주인한테 한마디 했던 게 화근이 되어 임대계약을 연장할 수 없게 되었다. 작업하는데 드는 돈 쓰기도 아까운 차에 작업실마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작업실이 유지된다고 해도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일과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듯 돈 드는 작업, 이 두 가지 일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갈 에너지도 열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야 할 때 나는 심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그렇게나 나를 힘들게 했던 내려놓음은 해 진 뒤 땅거미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후로 작업을 일절 하지 않았다. 작업에 대한 번 아웃이었다. 내내 회복되지 않았다. 교습소 운영 중에 시간 강의를 몇 년 나갔는데 매 학기 이력서를 제출해야 했다. 작업을 하지 않고 있으니 전시 경력이 더 이상 늘지 않았고 몇 학기째 동일한 이력서를 내자니 스스로 민망해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내 석사의 효용은 그것으로 끝났다. 석사 취득은 내 인생의 후회 목록에 높은 순위로 랭크되어 있다. 20대 젊은 날 그림에 대한 열정이라고 여겼던 간절함은 그저 욕심이었을 것이다.



‘너 그거 열정 아니야, 네가 그렇게 작업을 원했다면 어떻게든 손에서 놓아지지 않았을걸’

‘수화 김환기 화백은 직장인처럼 출퇴근 시간 맞춰 놓고 그림을 그리셨다고. 너는?’

‘천경자 선생님은 마루 구석에 놓인 그릇에 물이 땡땡 얼어있을 만큼 추운 겨울에도 엎드려 그림을 그리셨대. 프리다 칼로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서 침대에 누워서도 그림을 그렸고. 너는, 네가 그렇게나 그림 그리기를 원했어?’

“화실 친구 성남이는 뭐라도 가진 게 있어서 지금 그렇게 잘 나가냐? 온전히 실력만으로 살아남았잖아. 네가 그 정도 재능이 있길 하냐? 근성이 있길 하냐”



성공한 작가가 되고 내세우기 좋은 직업도 갖고 싶었던 것, 그 욕심을 그림에 대한 열정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정작 작업은 내가 열망하는 만큼 열심히 하거나 시간을 들이지도 않았다. 전시가 잡히거나 공모전이나 있어야 애써 마감일에 맞출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놓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들끓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 뿐이다. 또 내가 이 바닥에서 두각을 드러낼 만큼의 굉장한 작업을 하는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이 정리가 됐다. 문제는. 작업을 포기하고 나니 친구들은 대리, 과장을 달고 사회적 입지를 넓혀 가고 있는데 나는 나이 서른 넘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것. 팸플릿에 들어가는 경력 그 한 줄 한 줄을 더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전력을 다했던 전시 경력들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졌다는 것,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가 결과적으로는 헛된 시간이 되어버렸다는 것, 지갑에 들어있는 몇 장의 지폐가 전 재산이라는 것. 결국 나는 내 멋대로 살다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열패감에 극심한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이 도졌으나 비정형성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제 교습소만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가르치는 일에 달란트가 있었고 아이들을 예뻐했고 잘 다루는 편이었다. 발달한 직관은 아이들의 상태와 그림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됐다. 아이들과 아이들의 그림을 잘 이해하기 위해 미술치료 공부를 따로 하는 열성도 있었다. 덕분에 제대로 가르친다는 자긍심,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아이들도 잘 따랐다. 대부분의 일정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고 방학 때마다 휴가를 낼 수 있고 주말과 빨간날마다 쉴 수 있는 일. 내 체력만큼 하루에 반나절만 일해도 되고 날마다 칼퇴근을 해도 되는일. 게다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이런 직업이 흔하랴. 그림 작업은 혼자 하는 일이었다 보니 성향상 사회에서 융합을 요구하는 조직 생활을 하려면 오히려 힘들었을 것이다. 또 나는 장사를 할 만큼의 셈도 없다. 나이의 숫자가 커질수록 내가 이 직업을 갖게 된 건 다행이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한 번씩 선생님은 꿈이 뭐였냐고 해맑게 물었다. 나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옛 친구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어쩌다 보니 꿈을 잃어버렸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한번 으쓱 올렸다 내리며 말했으면 적당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걸 그랬나. 그냥 미술 선생님이 꿈이었다고 말했으면 좋았을까?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그럼 솔직하게, 버텨봤더니 주제넘은 욕심이라 포기했다고 해야 했을까. 이도 저도 아이들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다. 아직도 아픈 데가 건드려질 때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차라리 선생님은 앞으로 꿈이 뭐냐고 미래형으로 물었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선생님 꿈은 작가라고, 그런데 그림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기다려 보라고. 너희들과의 이야기를 엮어서 글을 쓰는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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