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는 위대하다, 그러나
나는 유아 시절 엄마 손길을 못 느끼고 자랐다. 엄마는 내 돌이 지나고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는데 그 때문인지 이 시기엔 외가에서 살았다. 사별하신 할머니는 당시 아드님 넷을 건사하셨는데 그 와중에 나까지 봐주셔야 했다. 친가에서 데려가 봐주실 때도 있었다. 훗날 외할머니 말씀으로는 해 질 녘에 막내 고모가 나를 업고 대문으로 들어서면 그렇게 야속하더라고 하셨다. 꼭 밥 지을 때면 데려온다고. 그래도 네가 얌전했다고. 여기 앉아 있거라 하면 여기 앉아 있고 저기 앉아 있거라 하면 저기 앉아 있고 그랬단다. 하루는 할머니가 계란 프라이를 하시는데 옆에서 보고 있자니 흰자 가운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할머니, 여기가 왜 똥그래져?"
할머니는 숟가락을 옆으로 세워 계란 흰자를 딱 터뜨리며 말씀하셨다.
"네가 깍정이라서 그래!"
1919년생인 할머니는 깍쟁이를 항상 깍정이라고 하셨다. 나무는 낭구, 계단은 가이당. 내가 깍정이라는 말씀엔 수긍이 갔다. 삼촌들한테도 듣던 말이었다. 그렇다고 계란 흰자 가운데가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채 저녁상이 차려졌다.
세 살 터울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는 평일엔 나를 외 이모할머니 댁에 맡겼다가 주말에 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 댁엔 엄마의 사촌 여동생들, 나에겐 언니, 이모뻘 되는 오촌 아줌마들이 여럿 있었다. 마루의 네 구석에 어린 아줌마들이 한 명씩 앉아 각자 자기에게 오라고 손뼉을 치며 부르면 나는 매번 제일 착한 첫째 아줌마에게 가서 안기곤 했단다. 만 네 살이 되기 전 다섯 살 봄엔 서울 외할머니댁에서 경기도 넓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대문은 하늘색이었다. 주소가 100호라 동네에선 ‘100호 집’이라 불렸다. 부모님이 출근하실 때면 엄마, 엄마 가지 말라고 징징거렸던 것 같다. 부모님 출근 후엔 유치원에 다녀오면 일해 주는 언니가 어린 자매를 봐줬다. 나는 생일이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한 해 일찍 갔는데 그 해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사업을 접고 부모님 두 분 다 한동안 집에 계셨다. 내내 남의 손에 자라던 터라 부모님과 하루 종일 함께 했던 시절은 좋기도 했겠지만, 유년의 상처가 많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하루는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다. 웬일로 엄마가 거실에 상을 펴시더니 앉아 보라고 하셨다. 상 위에는 유리잔이며 뭐며 이것저것 배치가 됐다.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같이 놀아 주시는 일은 전에 없던 일이어서 나는 몹시 흥분했다. 데리고 간 친구는 나란히 앉았지만, 안중에도 없었다. 장식장에서 꺼낸 몇 개의 유리잔에 높이가 다르게 물을 채웠다. 그런 내용의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걸 엄마랑 직접 해 보다니. 숟가락으로 유리잔을 두드리면 나는 소리의 차이를 알아보는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가 한 번씩 유리잔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내고 난 뒤 우리에게 질문하면 친구는 맞히는데 나는 틀렸다. 다시 해봐도 친구는 맞는 대답을 하고 나는 틀린 대답을 했다. 또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얌전하게 앉아서 차분하게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잘 해냈고 나는 자리를 들썩거리며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강아지들이 너무 신나면 헥헥거리며 뛰어올라 온몸으로 박치기를 해댄다. 그럴 땐 간식을 줘도 금방 찾아 먹지도 못하는데 그때 내 모습이 그랬다.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면서 정신없이 겅중겅중 뛰는 강아지 같았다. (차마 ‘개’라고는 쓰지 못 하겠다) 나는 그 시간이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황홀했기 때문에 실험이고 뭐고 눈에 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었고 엄마는 정작 딸내미는 계속 틀리고 친구만 맞히고 있으니 괜한 일을 벌였지, 싶으셨나 보다. 급기야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구고 짜증이 묻어 있는 한 마디를 던지며 일어나셨다.
“관두자”
전무후무했던 엄마표 놀이는 이렇게 가차 없이 막을 내렸다.
지난 COVID-19 때는 대부분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엄마표 놀이, 엄마표 미술을 시도해 보는 가정이 꽤 있었을 것 같다. 부모님과 같이 놀이도 하고 미술 활동도 하면서 피할 수 없는 시간을 즐겼다면 원치는 않았더라도 힘든 시기에 오히려 좋은 시간이 됐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미술에 관한 책도 빌려다 보면서 얘기 나누고 그림도 그리고 또 만들어도 보고. 거기다가 칭찬까지 들을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이들의 미술 활동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칭찬과 지지를 해주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도 칭찬의 진정성을 느낀다.
파인애플, 이 부분은 색깔을 한 가지로만 칠하지 않아서 훨씬 맛있어 보인다든가 꽃 그림이라면 향기가 좋을 것 같은 색감이라든가 하는 감상을 곁들여 준다. 자동차를 미래형으로 그렸다면 디자인이 멋지다든가 하는 식으로 근거를 들어서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부분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면서 흥미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결과물을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다 쓴 스케치북 집에 가져가라고 하면
“우리 엄마는 보지도 않아요. 그냥 다 잘 그렸다고 하세요”
놀이미술 작품 가져가라고 하면
“가져가면 둘 데 없다고 다 버려요”
하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이런 반응일 때 아이들이 신이 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림으로 다 채워진 스케치북을 한 장씩 보면서 제목을 다시 붙여 보는 것도 부모님과 할 수 있는 좋은 미술활동이 된다. 교습소를 운영할 때 나는 아이들이 스케치북 한 권을 다 쓰면 집에 가져가도록 했다. 가져가기 전에 첫 장부터 그림을 보면서 제목을 다시 정할지 물어보고 그림 한 귀퉁이에 적어 준다. 아이들은 그림에 제목 붙이는 걸 즐겼다. 자신의 그림을 한 장 한 장 봐주는 것, 그 주위를 친구들이 둘러싸고 자기 그림에 관심 가져 주는 것. 그 자체로 존중받는 느낌을 얻는 눈치였다.
놀이 미술 같은 경우엔 완성된 작품을 들고 가면 사실 둘 곳도 마땅치 않고 어른들 눈엔 별것도 아니고 너저분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 보는 앞에서 버리는 건 정말 좋지 않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무시당하는 느낌일 것이다. 나는 학부모님들에게 이렇게 권해 드렸다. 놀이 미술 완성품을 두는 자리를 정해 놓고 다음번 작품을 가져갈 때까지만 그 자리에 두는 걸로 아이와 의논해서 합의를 보는 게 좋다고. 공간이 넓어서 가져가는 대로 다 전시해 두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여유 공간이 없다면 이런 방법도 괜찮다. 그럴만한 공간도 없다? 그림이나 놀이 미술 작품을 사진 찍어서 sns에 포스팅해 두어도 좋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존중받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포스팅하면서 제목도 다시 정하고 그림 그릴 때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그린 것이고 하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들의 마음을 엿볼 수도 있을테고 말이다.
아이들은 본인의 작품이 마음에 들면 얼마나 야무지게 챙겨 가는지 모른다. 아이들 자신도 매번 자기 작품이 마음에 들게 나올 수는 없다.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슬그머니 두고 가기도 한다. 그러니 일단 챙겨 갔으면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챙겨갔는데 부모님이 별 관심도 없이 ‘어~ 그래, 잘했다’ 하고는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시킨다면. 아이들이 표현은 안 해도 내상을 입을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런 식으로 아이의 미술 활동에 대해 관심도 없고 지지나 존중은 해 주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것은 반칙이다.
아이들은 평소 생활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 새롭게 체험하면서 인상 깊었던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아직은 말이나 글로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에 놀이공원에 가서 처음 본 동물이나 재미있게 타 본 놀이기구를 그려보고 싶을 수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인상적이었던 노을의 색깔을 표현해 보고 싶을 수도 있다. 또 새로 산 인형이나 장난감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았다면 그것을 그려 보고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활 중에 오감을 통해 피부로 느끼고 경험한 것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부분이다.
앞서 말한 엄마의 이모님 댁에서 지낼 때였다. 토마토를 심어 놓은 밭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만져 본, 손에 묻은 토마토 향이 한여름 태양 아래서 어찌나 강렬했던지 이십 대 중반 정도까지는 ‘토마토’라는 말만 들어도 그 특유의 풋내가 생생하게 기억났었다. 또 열 살 때는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갔었다. 지금의 서초구 어디쯤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강남 지역은 논밭이었고 겨울이면 논에 물을 대고 얼려서 스케이트 장으로 활용하던 시절이었다.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섰다. 처음으로 신어 본 스케이트가 낯설었지만, 빙판에 비치던 차가운 햇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잠깐 가만히 응시하며 서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겨울이 다가오면 스케이트를 신고 서 있던 생경한 느낌과 함께 겨울 아침 투명한 얼음판에 눈부시게 반사된 햇살이 떠올려졌다. 이처럼 아동기의 세상에 대한 첫 경험은 지속적으로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심장에 새겨진다면 오감을 통한 경험은 뇌에 새겨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뭘 그려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출력은 입력값이 있어야 가능하다. 늘 똑같은 일상으로 폰만 들여다보면서 게임만 하는 아이라면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오감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해야 뇌도 자극을 받아 표현하고 싶어진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표현해 보려는 시도, 표현해 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렇게 아이가 뭔가를 표현하였을 때는 그 결과를 지지하고 존중해 줘야 한다. 엄마나 아빠, 혹은 누가 옆에서
“아이고오, 그 자동차가 어디 굴러나 가겠니”
“어디 엄마 얼굴이 이렇게 못생겼니! 이게 뭐니!”
“사과를 이렇게 칠하면 사과 같지 않잖아, 이 색깔로 칠해 봐”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면 의욕이든 자신감이든 뭐라도 꺾일 것이다. 에이, 누가 그런 말을 하겠냐고? 모두 내가 직접 들어 본 경우다. 아이들은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마음의 상처가 소리 없이 새겨지는 게 보인다. 옆에서 보는데 한숨이 절로 나면서 내가 다 맥이 빠졌다. 주눅 들어버린 아이의 시선을 피해 바쁜 눈짓을 보내야 했다. 민망하지만 두고 볼 수만도 없어서 애써 웃으며 소곤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네? 제가 뭘요? 원장님 저 뭐라고 한 적 없어요!”
내가 대낮에 코 앞에서 말하는 귀신이라도 봤단 말인가. 어이가 없는데 슬몃 아이를 보니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겹쳐 보인다. 기대 없음, 답답함, 짜증, 억눌림, 무기력, 해탈.... 아휴, 너 딱해서 어쩌니. 물론 엄마의 악의일 리는 없다. 순간 방어적으로 나오는 말이겠지만 아이들은 돌 맞은 개구리가 되고 만다. 나는 이렇게 딱해진 개구리들을 많이 보았다.
“저는 제 그림이 마음에 드는데요?”
라고, 말하는 아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른의 권위, 부모의 권위 앞에서 내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엄마표 미술이 독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 노는 게 낫다고 할 수 있다. 엄마표 미술을 할 때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하는 시간이 엄마의 통제로 인해 아이에게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술활동에 대해 평소에 아이가 자신없어 할수록 더욱 그렇다. 열 살 미만의 시기는 표현이 중요한 시기이고 그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아이가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지켜봐 줘야 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나 다름 없어서 아이의 우주라고도 한다. 나는 엄마하고는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다. 아니 엄마가 눈에 보이기만 해도 좋았다. 방과 후에 집에 갔는데 엄마가 어쩌다 출근하지 않고 계신 날이면 집안이 환했고 공기부터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한 공간에 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그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이 되어 내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해져서 행복했다. 내 유년의 유일했던 엄마표 놀이 시간에 모친께서 숟가락을 떨군 채 일어나버리지 않으셨다면. 그랬다면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불멸이 됐을 텐데. 지금 팔십 세를 넘긴 내 모친께선 그 날의 일곱 살짜리 개구리를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말이다. 유년 시절의 나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딱했던 개구리들과 여전히 딱한 개구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개구리들아, 힘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