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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상자

엄마 보석상자를 내가 갖고 있으면, 눈물 상자가 될 거 같단 말이야

by 그레이스

퇴근하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걸려있던 옷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산 건지도 모를 옷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는데, 구석에서 에코백 하나가 보인다. 에코백을 열어보니 엄마가 주부대학 졸업 선물로 받은 자개 보석상자가 담겨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꽤 긴 시간을 힘들어하셨다. 그 당시 나는 서울로 상경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엄마를 보며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수가 별로 없는 작은오빠도 그런 엄마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에게 쉬는 날 할머니만 따라다니면 용돈을 주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엄마는 자주 다니던 모임들에도 나가지 않고, 가급적 외출을 하지 않으셨다.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셋째 언니는 결혼 후 서울에서 거주 중이었고, 아이를 가져 입덧을 하고 있어서 미주알고주알 엄마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한 번은 낚시를 좋아하는 작은 오빠랑 같이 엄마를 설득해 목포 밤낚시를 간 적이 있다. 엄마는 낚시하는 오빠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몸도 고생하고 시간도 돈도 낭비한다고 말이다. 엄마랑 함께 갔던 낚시에서는 오빠의 낚시 박스 뚜껑이 안 닫힐 정도로 갈치를 실컷 낚았고, 엄마도 밤샘 낚시를 하고도 피곤해하지 않고 좋아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많이 밝아졌다. 나는 엄마에게 컴퓨터를 가르쳐드렸다. 타자연습부터 고스톱 게임까지. 그때 엄마의 나이가 60대 중반이었다.


“아니 엄마, 밤새 고스톱을 친 거야?”

“내가 돈을 좀 땄더니, 저쪽에서 욕을 쓰더라니까? 그래서 나도 쓰려고 몇 자 적고 있는데 휘리릭 그냥 나가버리더라”


나는 엄마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엄마가 더 많은 것을 알고 할 수 있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주부대학 입학을 권유했었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 엄마는 컴퓨터도 배우고, 한자 공예도 배우고, 사람들과 함께 야유회도 다니면서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주부대학을 졸업하며 받은 선물을 나에게 주셨다.


그 보석 상자 안에는 스무 살 성인식 날 셋째 언니가 사 준 목걸이, 대학 입학 선물로 작은 언니가 사준 반지, 큰 언니가 결혼하기 며칠 전에 준 반지, 대학 졸업 때 작은엄마가 사준 반지, 올케 언니가 취직 기념으로 사준 반지 등이 들어있었다.


이 금붙이들을 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딸아이다. 숨어있다 놀라게 해줄 마음으로 가만히 있었더니, 딸이 엄마를 부르며 나를 찾고 있다.


“엄마! 여기서 뭐 해!”

“엄마 보석상자 볼래? 이거 다 선물 받은 거야”


딸아이에게 하나씩 들고 선물 받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기까지는 엄마 꺼고, 자 여기서부터는 우리 딸 거야. 이 반지는 외할머니가 우리 딸 돌 때 해준 반지고, 이거는 아기 때 네가 차고 있었던 목걸이.”

“번호가 엄마 번호네?”


미아 방지 목걸이 펜던트 뒤에 있는 번호를 보더니 딸아이가 웃으며 묻는다.


“응. 이거는 오빠 거야. 딸은 호랑이 모양이었고, 오빠는 돼지 모양”

“엄마. 많이 아픈 거야? 갑자기 나한테 이거 왜 다 보여줘?”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딸이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아니야~ 엄마가 옷장 보다가 갑자기 보석상자를 발견했는데, 엄마가 선물 받았던 것들 자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너네 것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어 이거는 아빠가 한 번도 안 뺀 반지랑 같은 모양이잖아! 엄마는 없다며 버렸다며!”


딸이 울음을 멈추더니 나에게 물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빠랑 엄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산 커플링이야. 아빠랑 엄마랑 사귈 때 엄청 싸웠던 날이 있거든? 그날 엄마가 이거 반지 빼서 아빠 줬는데, 아빠가 안 받겠다고 하는 거 있지? 그래서 엄마가 차에서 던졌어. 그러고 나서 엄마는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어느 날 아빠 차에 탔는데 이게 차문 아래 구석에 있더라고? 그래서 엄마가 몰래 숨겼어. 아빠가 그 후로 묻지를 않더라? 그니까 너도 모르는 척해야 돼~”


딸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엄마가 반지를 던진 게 미안했어서 아빠한테 결혼할 때 반지 얘기를 안 했거든. 그래서 엄마는 결혼할 때 예물이 없어. 이것들은 결혼 5주년, 10주년, 15주년 이럴 때 아빠가 하나씩 엄마한테 선물해 준 것들이야. 엄마가 오빠랑 너한테 나눠줄게”


딸이 또 소리를 내서 엉엉 운다.


“딸 울지 마~ 이거는 엄마가 할머니 회갑 기념으로 사줬던 금팔찌인데, 할머니가 엄마를 다시 줬어. 그리고 여기 반지도 순금이다? 엄마 부자지?”


딸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나는 우는 딸을 한참 안아줬다. 그 후 며칠이 지나서 딸아이가 나에게 조용히 찾아왔다.


“엄마, 나는 엄마 보석상자 얘기에서 기억에 남는 거 엄마랑 아빠 커플 반지 얘기밖에 없어. 엄마 보석상자를 내가 갖고 있으면, 눈물 상자가 될 거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가 나중에 나중에 정말 나중에 나랑 오빠 아기들한테 직접 말하고 나눠줘.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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