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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으로

버거운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by 그레이스

퇴원 예정일 보다 하루 더 빨리 집으로 갈 수 있게 됐다. 퇴원 후 요양병원으로 옮겨서 재활치료를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커튼 뒤의 그녀는 집에서 항암치료를 받았을 때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야기해 주며 나에게 요양병원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당부했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는 딸아이의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반갑게 맞아주고 싶어서 문 앞에 서있었는데, 딸은 나를 보자마자 주저앉아 울었다. 한참을 우는 딸을 말없이 안아주었다.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었으면 나를 보자마자 울어버렸을까. 마음이 아프다.


두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는 아들이 집에 왔다. 아들은 나를 보자마자 한번 꼭 안아주고는 아무 말이 없다. 너도 많이 힘들었구나.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아이들을 힘들게 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던 지라 지금 이 시간이 한없이 미안하다. 남편은 나를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왼쪽에는 아들이 무릎을 베고 누워있고, 오른쪽에는 딸이 내 손을 잡고 있다. 아이들이 이렇게 양쪽에서 나를 지켰던 적이 언제인가 생각해 보니, 딸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다.


아들도 어렸던 때라 내 품에 안기고 싶었을 텐데, 모유 수유 탓에 동생이 엄마의 품을 차지하고 있으니 내 몸 어디에라도 자기의 몸을 기대고 놀던 때다. 딸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어느 날 천둥이 매섭게 쳤었다. 아들은 천둥번개 소리가 무서운지 내 팔을 꼭 안고 있었고, 딸은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지금이 그 천둥번개만큼이나 무서운 순간일까.


집에 오긴 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일주일 후에는 다시 검사를 하고 치료 방향을 정해야 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시작할 수 도 없었다.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다. 열흘 남짓한 병원 생활이 내 일상에 단층을 만든 것 같다.


남편은 아침마다 찐 당근과 비트에 사과, 바나나, 토마토를 넣어 주스를 만들어 주고는 출근을 했다. 아들은 늘 그렇듯 깨우지 않아도 일어났고, 딸은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 하긴 하지만 이름을 부르면 싱긋 웃으면서 일어난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 속으로 가고 나만 혼자 남겨졌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당장 하고 싶은 것도 생각이 안 난다. 책도 손에 안 들어오고 핸드폰도 들여다보기 싫다. 병원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나를 가운데에 세워놓고 빙글빙글 돌던 소용돌이가 잠시 멈춘 이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아 두렵다.


아침나절에 즐겨 마시던 커피는 약 때문에 마실 수 없게 됐고, 그래서인지 스르르 잠들다 깨기를 반복했다. 이따금씩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걸려오는 남편의 전화를 받으며, 한없이 우울했다가 괜찮아졌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호르몬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약도 복용하고 있어서일까. 폐경기에 겪어야 할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걸 단단히 준비하고 마주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지도 않은 일을 맞닥뜨린 탓일까 지금 흐르는 시간 자체가 내겐 너무 버겁다.


수술이 끝나면 빠르게 일상으로 스며들고 싶어서 가족 외에는 누구에게도 내가 아프다는 걸 알리지 않았는데, 수술 전에 비해 체력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져 있다. 병실 커튼 뒤의 그녀는 이런 일을 먼저 겪어봐서 나에게 집으로 가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볼펜을 들었다. 달력에 앉아 수술 날짜 이후로 ‘감사 1’, ‘감사 2’, ‘감사 3’이라고 적었다. 날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자고 해놓고는 금세 잊어버린 나를 다잡기 위해서다. 또, 하루에 계단 10층 이상 오르기, 물 많이 마시기, 내 마음 마음껏 표현하기 등을 적었다. 평범하기만 했던 내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 같았던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것인지. 나는 이 버거운 소용돌이 속에 들어와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그렇게, 때로는 너무 버겁고 때로는 얼른 지나가길 바랐고, 또 때로는 한없이 행복했던 나의 일상 속으로 천천히 다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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