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흉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나는 태어나서 우리 할머니처럼 가슴이 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학교를 다녀오는 내게 사탕을 쥐어 주고 싶어서 마을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던 할머니. 하얀 스웨터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할머니에게 안기면 내 얼굴은 할머니의 가슴골에 쏙 들어갔다. 아마 할머니를 떠올리면 우리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의 큰 가슴부터 생각날 것이다. 할머니는 그 큰 가슴 때문에 몸을 앞으로 구부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늘 상체가 뒤로 기울어져 있었다.
여름에는 할머니의 가슴을 들고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할머니의 가슴 아래는 땀띠가 생길 정도였다. 내가 부채질을 하면 할머니는 양손으로 가슴을 들고 계셨다. 한쪽 가슴이 내 머리통만 했다.
가슴이 막 나오려고 하는 사춘기 시절, 나는 할머니의 유전자가 나에게 있을까 봐 두려웠다. 두려움은 공포에 가까웠고, 그래서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다. 아빠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 안 피고 다니면 기둥나무에 묶어 놓고 나간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나는 아빠가 기둥나무에 나를 묶는 것보다 할머니만큼 큰 가슴을 갖게 되는 게 더 무서웠다.
할머니를 닮은 두 고모들도 유달리 발달했던 상체 덕분에 다리는 유독 가늘게 보였고, 몸은 유독 커 보였다. 마치 고려백자 같은 그 모습이 되기 싫어서 늘 어깨를 움츠리고 브래지어를 꽉 조였다.
그렇게 10대를 보낸 나는 자세가 굳어져 버렸다. 다행스럽게 할머니만큼이나 가슴이 크진 않았지만, 평균보다는 큰 가슴을 갖게 됐다. 모유 수유를 하던 시절에는 평소보다 더 커진 가슴을 보며 얼른 조금이라도 더 작아졌으면 했던 적도 있다.
그런 가슴이 아프단다. 미안해진다. 내가 너무 어깨를 움츠리고 브래지어를 꽉 조여서, 또 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 그랬을까. 내 신체 부위 중에 유달리 따뜻했던 가슴이다. 철없던 시절에는 축소 수술도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몸에서 그리 크지도 않은 부분인데 말이다.
그 가슴의 한 부분을 도려냈다. 마치 칼을 맞은 듯한 12cm가 넘는 흉터도 남았다. 겨드랑이에는 림프절 검사를 하기 위한 7cm 정도의 긴 흉터도 남았다. 그렇게 내 왼쪽 가슴은 볼 때마다 어루만져주고 싶을 만큼 큰 흉터가 생겼다. 이제 이 흉터 때문에 대중목욕탕에 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유달리 물을 좋아하는 우리 딸이랑 물놀이를 다니기도 힘들 것 같다. 마냥 미안해진다.
붕대를 처음으로 풀던 날, 딸아이는 내 흉터를 보더니 소리 없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러곤 내 흉터로 손을 뻗었다. 내 병이 전염병도 아닌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움찔하며 몸을 돌렸다.
“엄마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래.”
움찔하는 내 모습을 보며 더 슬픈 눈을 하는 딸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봤지만,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또 떨어졌다. 요새 내가 우리 딸의 눈물버튼이다. 나 때문에 우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내가 눈물버튼이 될 줄이야.
수술하기 전에는 통증이 없었는데, 요새는 가끔씩 찌릿한 통증도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 한껏 움츠리고 지냈던 가슴에게 미안해진다. 이제부터라도 어깨를 쫙 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날마다 10분씩 벽에 기대서 자세교정을 할 것이다. 아빠가 말했던 기둥나무에 묶여있는 것처럼 가슴을 쫙 펴볼 것이다. 이 흉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나는 이 흉터에 또 다른 흉터가 덧나지 않기를 아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