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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앞의 천사와 악마

by 미르

여행을 다녀오면 남는 것은 사진뿐인가?

아니다. 산처럼 거대한 빨래더미가 남는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저 여행은 즐거운 것. 그 뒤처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제는 안다. 그 뒤에는 엄마라는 주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가족들이 며칠 동안 잘 입은 옷을 일부는 세탁망에, 일부는 여행용 트렁크 구석구석에 잘 넣어왔다.


어느 나라에선가 여행용 가방 경매가 열린다고 한다. 공항에서 분실된 가방을 일정 기간 동안 찾아가지 않으면 일반인을 상대로 경매에 부친다.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가방을 오픈하지 않은 채로 경매가 시작된다. 자신이 구매한 가방에 땀에 전 빨랫감들이 가득 들어 있는지 값비싼 여행 기념품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채로 가방의 겉모습만 보고 선택을 해야 한다.


두 가지 사실에 놀란다.

첫째, 여행 가방을 잃어버리고 찾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커다란 존재감을 내뿜는 가방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것을 찾지 않는 것도 더 놀랍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아도 귀찮아서 그냥 버리는 것인가? 참으로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둘째,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재미로 혹은 요행으로 값비싼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여행 가기 전의 준비물은 궁금할 수 있다. 어떤 물건을 어떻게 준비해서 가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이 노리는 것은 여행 다녀온 후의 가방이다. 땀에 전 빨랫감으로 가득 찬 가방을 고른 이는 과연 어떤 심경일지 궁금해진다.

하여튼 세상의 별난 이벤트이다.


4일 치의 가득한 빨랫감을 세탁기 앞에 대기시키고 안으로 넣으려는 순간 흰옷, 레이스가 달린 얇은 옷들이 우아한 비명을 지른다.

'나 세탁기에 못 들어가~. 잘 알면서...'

'감히 나보고 세탁기에 들어가라고?'

'저기 들어가면 나 망가질 거야!'

'나 날개 찢어진다?'

휴, 섬세하고 예민한 천사 날개 같은 옷들을 조심스럽게 따로 빼준다.


이번에는 입을 때는 세상 무난한 얼굴로 세련됨을 자랑하던 검은색, 물 빠지는 옷들이 세탁기 앞에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 댄다.

'나 세탁기에 들어간다? 내가 물 좀 흐려도 돼?‘

'내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나 저기 들어간다. 들어가!‘

‘와 신난다! 이제 들어간다.'

세탁기에 기어 들어가려 하는 악마 같은 검정을 꺼내준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완전무결해 보이는 완벽한 사람들에게는 왠지 다가가기가 힘이 든다. 자칫 잘못하면 나의 작은 어두움이 드러나 창피할까 싶어 멀리서 바라본다. 완벽해 보이는 가운데 인간적인 면모가 1%라도 섞이면 그제야 다소 편한 마음으로 다가가 본다.


주위에 불편한 검은 기운을 내뿜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라며 자신의 기분을 주위에 마구 뿌려댄다. 주위 사람들의 불편한 기분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러면 왠지 다가가기가 힘들다. 그 기운에 물들어 나도 검게 변하는 듯하다.

너무 흰 것도 까만 것도 힘이 든다.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에 말리고 하는 동안에 손으로 정성스럽게 천사들과 악마들을 세탁하기를 반복하면서 여행의 마무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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