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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복을 만나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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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우리는 지네야
악마의 속삭임
by
미르
Jan 02. 2025
겨울옷을 꺼냈다.
부피가 상당한 겨울옷들은
나의 소박한 옷장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평소에 안 쓰는 커다란 여행 캐리어에 넣어 보관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숙명을
알아차린 우리 집의 캐리어들.
봄, 여름, 가을 3 계절이나
털 달린 뜨뜻한 겨울옷들을
겸허한 마음으로 품어 준다.
베란다에 차곡차곡 올려놓은 캐리어를 꺼내는 힘 좋은 남편.
잘한다 잘한다!
파이팅!
사랑해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준다.
드디어 만난 겨울옷.
아, 이 옷도 있었지.
분명 작년에도 잘 입었던 옷이 새롭게 다시 보인다.
어라.
겨울옷이 커졌다.
아니다.
살이 빠졌구나!
봄부터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밥을 좀 많이 먹으면 1kg 정도는 왔다 갔다 해서
체중계를 그리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최근에 계속해서 낮은 숫자가 나오길래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겨울옷을 입고 알았다.
이런 기분 좋은 일이.
패딩을 입으면 곰돌이 같아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미묘한 느낌이 다르다.
살이 빠졌구나.
달리기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좋은 일도 있었다.
멀리 사는 언니와 가끔씩 만날 때마다
옷을 사이좋게 교환한다.
키가 크고 날씬한 언니는
자신이 샀는데 커서 못 입는 옷을
나에게 준다.
나는 예뻐서 샀는데,
입으면 정말 예쁜데
미묘하게 불편한 옷들을
언니에게 준다.
작년에 언니에게서 받은 검정 패딩은 좀 꽉 꼈다.
그래서 숨 참을 일이 있을 때만 몇 번 입었다.
그런데 올해 입어 보니 아주 딱이다.
요즘 잘 입을 수 있겠다.
내가 언니에게 준 연한 회색 패딩도
생각이 났다.
아, 치마랑 입으면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패딩인데.
요즘 같은 분위기면 내가 입어도 될 듯한데.
줬다 뺐으면 아주 치사한데.
치사한 인간이 되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쇼핑을 가야겠다.
계절이 바뀌면 옷이 있는데도
왜 쇼핑 생각이 나는지 정말 미스테리하다.
쇼핑하는 인간
호모 쇼핑쿠스.
이런 말을 사회학자들이 하나 만들고
심리를 파헤쳐서
그 대처방안까지 일러 주면 좋겠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이런 용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쇼핑의 파트너 딸과 쇼핑을 하러 갔다.
분명 치마와 어울리는 연한 색의 패딩을 사러 갔다.
사고 싶은 패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 날이 있다.
이 바지가 어떨까?
바지통이 좀 큰 스타일이라
편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쇼핑의 화신이 속삭인다.
"엄마 안 입으면 내가 입으면 되지."
어, 바지허리 부분이 고무줄로 되어 있으니
그래도 되겠다.
와, 이 바지는 좀 진한 색 청바지라
출근할 때 정장인 척하고 입고 가도 되겠는데?
"그럼, 출근할 때 입어야지~"
아, 색이 연한 바지도 하나 필요하지.
연한 베이지색이 정말 예쁘게 나왔는데.
"그럼 그럼, 둘 다 사~"
옆에서 계속 추임새가 들어온다.
덜컥 덜컥 사 버린다.
오늘 쇼핑의 화신님도 바지가 필요하단다.
같이 바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계속 이어진다.
덜컥 덜컥.
신이 나고 신이 난 쇼핑의 화신은 노래도 부른다.
'우리는 지네야, 지네.
발도 많고 다리도 많다네.
우리는 지네야, 지네.
발도 많고 다리도 많다네.'
얼씨구, 신이 아주 나 버렸다.
옆에서 같이 나도 신이 나는구나.
아, 나의 이성을 잡아 주는 천사는
어디 갔을까?
지난주 퇴근의 기쁨에 젖어
책상 위에 고이 놔두고 온 텀블러를 지키고 있을까?
환경을 생각하고 지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바지가 몇 벌이나 왜
필요하냐
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
쩝.
할 말이 없다.
그냥 기분이 좋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색 맞춰 입고 나가면 기분이 좋다.
두 손 가득 바지를 사가지고
마음 한구석에 이래도 될까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몇 벌인지는 양심상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길거리의 반짝이는 불빛이 나에게 대답을 해 준다.
가끔씩은 그래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을 수도 있지
라고
위로를 해 준다.
그럼, 그럴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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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쇼핑
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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