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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의 김장법
기다려, 아직 아냐. 지금이야, 김장!
by
미르
Dec 26. 2024
11월이 되자 추운 위쪽 지방에서 김장 소식이 들려왔다.
기다려.
아직 아냐.
여기는 눈도 거의 오지 않는 따뜻한 남쪽 부산.
먼 곳에서 들려오는 빨간 소식을 즐겁게 듣는다.
12월 마트에서 배추를 싣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파트 동 앞 택배 내리는 곳에 절임 배추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이다!
시작하자.
절임배추를 주문한다.
세탁기와 더불어 주부생활의 고마운 발명품이라 할 만하다.
마침 장을 보고 오다가 아파트 동 앞에서 택배의 산을 본다.
혹시나 싶어 쳐다보게 된 절임배추 상자.
우리 배추로구나.
배달을 하는 택배 아주머니.
오늘 30개의 절임배추 상자를 싣고 왔단다.
배추와 나, 택배 배달원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엘리베이터가 요즘 큰일 하고 있다.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부터 김장이다.
예전 어떤 소설에서
전쟁 중 피란 시절의 김장에 대해 읽었다.
고춧가루, 마늘, 소금으로만 김장을 했다. 요즘
수십 가지 양념이 들어가는 김장이 미안해질 지경이다.
고춧가루가 핵심이다.
좋은 고춧가루를 알아보는 능력?
없다.
근처의 마트 3곳에서 고춧가루를 사이좋게 사다 모았다.
올해의 김장이 성공하면 세 곳의 마트가 일 년 내내 나의 칭송을 받으리라.
공평하게 3종류의 고춧가루를 담았다.
오호, 3번째 고춧가루가 마음에 든다.
방앗간에서 막 빻아 내려온 거친 질감.
사나이 같은 강렬한 느낌.
12월 가계부에서
작년의 내가 남겨 놓은 포스트잇을 본다.
김치 독립을 하고 그동안 겪은 나만의 김장 레시피.
다음 해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
올해도 잘 접수했다.
니트릴 장갑.
어느 해이던가
배추와 양념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막상 요리용 셰프 장갑이 없어서
다시 집 앞 슈퍼로 뛰어가야 했었지.
메시지대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육수는 전날 끓여 놓았다.
멸치, 건새우, 다시마, 무, 양파.
기본들 입장.
이날을 위해 손질해서 말려서 모아놓은
파뿌리, 양파껍질, 표고버섯 기둥아.
다 들어가랏.
너희는 아직 죽지 않았다.
너의 힘을 마음껏 보여 주어라!
이렇게 정수를 모아 만들어 낸 육수.
찹쌀 풀을 만들 때 쓴다.
각종 과일들과 재료를 갈 때도 쓴다.
배, 사과, 양파.
베란다에서 비둘기로부터 잘 지켜 낸
홍시 하나도 속만 잘 파서 첨가한다.
무를 채칼로 썰고
갓을 씻어서 김칫소에 넣을 준비를 한다.
쪽파는 넣지 않는다.
프라이드치킨은 먹지만
물에 빠진 닭은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파전과 요리의 양념으로 들어가는 파는 먹지만
김치에 들어가는 파는
선호하지 않는다.
아직 파김치의 매력을 모른다.
어른 맞다.
어른이지만 싫은 것은 싫다.
나의 김치는 내가 만든다.
그러니 철저히 나의 취향이다.
청각.
먹어도 될까 싶은 이 독특한 비주얼의 해조류도
빠질 수 없지.
물에 불렸다가
이렇게까지 씻어야 하나 할 만큼 10번도 넘게 박박 씻는다. 겨우
맑은 물을 영접하고
끓는 물에 다시 데치고
그 얼굴을 마주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지렁이를 닮은 비주얼이
그대로 김치에 들어가면 난리가 난다.
칼을 쓱쓱 갈아
날카로운 칼로 또각또각 한없이 자른다.
이제 작은 벌레 모습이 되었다. 이
또한 그대로 들어가면
김치 속의 벌레.
갈아야 한다.
무와 육수를 첨가해서
갈갈갈
믹서기가 없으면 어찌 살았을지.
생새우.
오늘을 위해
아침에 남편이 시장에 가서
살아서 파닥파닥 뛰는 새우들을 봉지에 꽉 담아 왔다.
점프력이 굉장한 새우가 탈출할까 싶어
봉지 끝을 잘 모아 쥐고 소금을 넣고
살살 씻는다.
새우들아,
강력한 소금에 잠시 기절이라도 하렴.
많은 작은 것들을 갈아먹어야 한다.
좀 미안하지만 맛있는 일 년 김장을 위해 갈아야 한다.
생명이란 먹고 먹히는 것.
자연스러운 일일까?
오늘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많은 생명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낀다.
그에 비하면 굴은 양반이다.
눈도 없고 얼굴도 안 보이니
소금으로 설렁설렁 씻으며
손으로 잡히는 딱딱한 껍데기가 없나 확인만 하면 끝이다.
마늘과 생강은 미리 냉동실에 갈아 놓은 든든함으로 뿌듯하다.
과일의 단맛이 있더라도 단맛 그 자체인 꿀도 물엿도 포기할 수 없다.
새우젓, 멸치젓, 까나리액젓.
온갖 종류의 젓갈아, 다 같이 출동이다.
이 김장의 주제가 무어냐고 물으면
화합의 김치라고 말할 것이다.
(실은 맛에 자신이 없어서
뭐 하나라도 맞는 게 있겠지
하는 마음이다.)
이제 굴을 빼고 전부 다 김치 양념에 들어가라.
휘휘 휘젓기에 들어간다.
아, 까먹었다.
홍삼 한 포를 뜯어
나도 마시고
김장양념도 힘내라고
한 포 상납한다.
김치 양념이 완성되었다.
손등에 덜어 맛을 본다.
맛있다.
이상한데?
맛을 맞추기 위해서
열 번은 넘게 맛을 보고 또 봐서
그 맛을 알아야 하는데.
약간은 매콤하고
단맛이 돌지만 달지 않은 맛있는 맛이다.
뭘 조금이라도 더 첨가해야 할 듯해서
매실청, 깨소금, 참기름
더 들어간다.
몇 시간 전에 뒤집어 물을 빼놓은 배추에
양념을 넣기만 하면 된다.
올해의 절임 배추는 20kg.
덩치가 큰 배추들이 왔다.
거실 한가운데 주인공들 입장.
배추에 양념을 치대어 넣고
굴도 넣고
오리 궁둥이처럼 동그랗게 겉잎으로 싸서
김치통에 넣는 일이 반복된다.
양념이 온몸에 조금씩 튄다.
일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들이 모여
나의 경험이 되리라.
김치를 통에 담고
큼직큼직하게 썰어
소금에 살짝 절여 둔 무를
남은 양념에 대강 버무려
사이사이에 끼워 둔다.
찬바람이 불면서 시작된
마음의 숙제 같은 김장이 드디어 끝났다.
김장 끝.
바로 담근 맛있는 김치에
수육까지 하면 금상첨화이리라.
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나의 일 에너지를 오늘 김장에
다 쏟아부었다.
여기서 수육 만들기까지 들어가면
나는 내일
한의원이나 정형외과의 물리치료실 베드에 누워서
구름 같은 이불을 덮고
뜨끈한 붉은 불빛 아래에서
코를 골며 자게 될 것이다.
수육보다 목욕.
자유를 찾아 목욕탕으로.
꼴랑 5 포기 반 김장을 해 놓고.
keyword
김장양념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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