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작가야 Jun 11. 2024

어쩌면 행복

1화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무거운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린다. 그 액체는 내 손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도 미동도 없이 가만히 늘어져 있었다. 나는 내 정신이 희미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건 어쩌면 엄마나 아빠, 할머니 혹은 다른 누군가의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조차 싫어서 세상과 나 사이에 선을 그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나에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의식 속에서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에도 내 빌어먹을 인생은 머릿 속을 어지럽혔다.


30년 전, 도시 변두리의 산 밑 어느 골목길. 우렁찬 아이들의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 ‘홍매화’다. 친구들은 항상 나를 따랐다. 내가 산으로 가자고 하면 산으로, 들로 나가자 하면 들로 나갔다. 모험심과 자신감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내가 아직 학교를 가기 전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다. 우리 집 앞에는 동네 뒷산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한 겨울이면 어른들은 종종걸음을 걸어야 해서 불편하기만 한 언덕이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썰매장으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 언덕을 좋아했다.


‘이 언덕을 자전거로 내려가면 얼마나 빠를까?’


호기심이 가득했던 나는 그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 언덕을 자전거로 내달리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세발자전거를 낑낑거리며 끌고 올라가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콩닥 콩닥’


심장이 제멋대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발을 떼자 서서히 움직이던 자전거는 이내 바람을 가르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꺄~~~~~~~~~~~하하하하하”


자전거는 순식간에 언덕 아래까지 내달렸다. 내가 자전거 타며 웃는 목소리가 골목 여기저기에서 들렸는지 친구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현수도 있었다. 언덕 아래에 무사히 도착한 나는 격양된 목소리로 현수에게 짜릿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다.


“현수야, 나랑 같이 언덕에서 자전거 탈래? 이거 정말 재밌어! 진짜야! 너도 빨라지고 싶지 않아?”

“이거 타도 괜찮은 거야? 엄청 빨리 달리던데..”

“괜찮아~ 괜찮아~ 내가 해봤는데 별거 아니야!”


현수는 갸우뚱하는 듯하더니 이내 궁금했는지 내 자전거의 뒷 좌석을 차지했다. 뒤에서 내 허리춤을 움켜 쥔 현수의 떨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언덕을 내려와 본 나는 자신이 있었다. 좀 전과 같은 위치에 서있던 자전거는 나와 현수가 다리를 치켜들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아까보다 더 빠른데?’

‘어~ 어~!’


현수를 함께 태운 자전거는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언덕 아래를 향해 질주했다. 순간 겁에 질려 속도를 늦추기 위해 발을 땅에 대었다. 하지만 나와 현수를 태운 자전거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결국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나와 현수가 타고 있던 자전거는 언덕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슈퍼를 향해 돌진했다.


‘쾅!’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는 골목을 따라 울려 퍼졌고 나와 현수는 그대로 자전거와 함께 나뒹굴었다. 잠시 기절을 했는지 충돌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화야, 현수야, 괜찮니?”

“매화 엄마 좀 불러와야겠어요!”

“매화야 정신 차려!”

“아이고 이를 어째. 이가 다 부러졌네. 119 불러요. 119”


자전거가 돌진한 곳에는 슈퍼 앞 아주머니들이 앉아 쉬어가던 평상이 놓여 있었다. 평상에 정면으로 들이받은 나는 이가 7개나 부러진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른들에게 둘러 싸인 나와 현수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너무 아픈 고통에 다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앞니 7개가 부러진 상태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으니 어른이 아니라 어른 할아버지였어도 엉엉 울었을 것이다. 골목대장 홍매화라고 별 수 있으랴. 아프고, 서럽고, 놀란 마음에 피와 눈물, 콧물이 뒤 섞이도록 엉엉 울었다.


“엄므아~~~~~ 엄므아~~~~~”


내가 목 놓아 울고 있는 사이 119 구급대가 도착했다. 주황색 옷을 입고 나타난 삼촌, 이모들은 내 이가 부러진 곳을 확인하고 능숙하게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사고 소식을 들은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구급대원들 사이로 보이더니 구급대원들 사이를 비집고 엄마가 나타났다.


“매화야 이게 무슨 일이니?”

“엄므아~~~~~ 자즌거 타다가 (훌쩍) 부딪혔어. 으헝~~~~ 너무 아파~~~ 엄므아~~~~”

“현수도 다쳤구나. 괜찮니?”


구급대원 아저씨가 응급처치를 하는 내내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응급처치가 끝나자 엉엉 울고 있던 나는 엄마 품에 안기려 두 팔을 뻗었다. 엄마 품에서 아픔을 삭이고 싶었다.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인지 엄마는 품을 내주기 전에 내 손을 낚아채 집으로 데려갔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엄마가 봤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가 말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못생겼다는 이유로 엄마가 나를 때렸다고 말이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날 상처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엄마의 모습 대신 회초리를 들고 현수를 다치게 한 죄를 묻고 있는 엄마를 마주하면서 할머니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