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작가야 Jun 19. 2024

어쩌면 행복

2화

아찔했던 유아기의 기억은 잊고 싶어도 잊히지가 않는다. 충격이 심한 사건은 장기 기억으로 남는다는 말에 신뢰가 생기는 순간이다. 기억의 조각은 다시 빠르게 흘렀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에서 멈춰 섰다. 엄마의 모진 말과 엄한 훈육 속에서도 나는 우직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친구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적어도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면 나는 온전히 '홍매화' 그 자체로 빛날 수 있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나와 함께 자전거 사고를 겪은 현수도 여전히 내 소중한 친구다. 현수는 내가 아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돌이켜 보니 단 한 번도 아빠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날도 현수는 나와 함께였다. 


"현수야 우리 옆동네 놀러 가자! 거기 가본 적 없지?"

"거기가 어디야? 한 번도 안 가봤어."

"엄마가 하는 얘길 들었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했어. 그 동네에는 맛있는 꽈배기 파는 곳도 있다고 했어!"

"꽈배기? 나도 꽈배기 먹을래!"

"옆동네 갈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동네에서는 잘도 따라붙던 녀석들이 옆동네로 간다고 하니 겁을 집어 먹었다. 어차피 다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동네에 군림하고 있는 골목대장으로써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눈치를 보던 겁쟁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용감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나와 현수, 미애가 옆동네로 발길을 옮겼다. 꽈배기 얘기를 꺼낸 것은 제법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모험을 떠날 아이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했다. 모험에 들떠있는 기분과는 다르게 머릿속에는 불현듯 해가 지기 전에는 들어오라고 당부하던 엄마의 말이 맴돌며 상기된 감정을 다스렸다.


나와 현수를 포함한 세 명의 아이는 얘기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맛있는 꽈배기를 파는 곳은 어디인지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깎아 세웠다. 뽀빠이 아저씨가 나타나도 내 어깨를 보면 놀랄 것이었다.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올라앉았다. 6개의 짧은 발들이 의자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옹기종기 모인 발들이 쫑알쫑알 말을 나누던 사이 저 멀리서 버스가 다가왔다. 칠판을 긁을 때 나던 기분 나쁜 소리가 길게 나더니 버스가 멈춰 섰고 문이 활짝 열리면서 기사님의 얼굴이 보였다. 


"이 버스 무안동 가는 거 맞아요?"

"그래, 어서 타라."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나의 기세등등한 질문에 버스 기사님은 사막만큼 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기사님의 밋밋한 반응에 오히려 살짝 볼이 발개졌다. 입술이 삐죽거리며 나오려던 찰나에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내 뒤를 이었다. 발개지며 오므리던 얼굴은 휑하니 비어있는 뒷자리를 발견하고선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는 버스의 가장 뒷자리를 차지했다. 뒷자리에 앉으면 가장 높은 곳에서 풍경과 사람들이 내려다 보여서 앉아 있는 동안에는 어른이 된 기분을 어떻게든 느낄 수 있었다. 버스는 덜컹덜컹 문을 닫더니 울컥울컥 출발했다. 금세 속도를 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우리 동네는 저 뒤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이 익숙했다. 엄마와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버스를 타고 갈 때면 한참을 미동도 없이 가벼운 한숨을 쉬어가며 창 밖을 지긋이 내려다보곤 했었다. 


"엄마, 뭐 보고 있어?"

"응,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엄마는 사람들 보는 게 재밌어?"

"아니, 다들 잘 사는구나 싶어서"


아직 어렸던 나에게는 엄마의 말이 너무 어려웠다. 나는 엄마랑 동생이랑 잘 살고 있는데 왜 부러운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는지 모르겠다. 지금에서야 문득 떠오른 생각이지만 엄마는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려 치열한 하루를 보내고 버스에 앉아 있는 그 짧은 시간에도 허전함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가 감히 채울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내가 회상에 잠긴 사이 친구들은 여전히 옆에서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꽈배기에 정신이 팔려 나를 따라나선 아이들이었다.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내리자고 소리쳤고 세 명의 작은 아이들은 우당탕거리며 저 뒷자리에서부터 버스의 뒷문까지 헐레벌떡 달려 나갔다. 천천히 내려도 된다는 버스 기사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소리를 지를 참이었다.


"여기야. 우리 꽈배기부터 먹을까?"

"그래 좋아!"

"꽈배기 너무 기대된다!"

"저기 어디쯤일 텐데, 가보자!"


깔끔한 냄새가 나는 세탁소를 지나 골목을 돌아 나가자 고소한 튀김 냄새가 은은하게 코 끝을 스쳤다. 냄새의 끝에 꽈배기 가게가 있을 터였다. 후각이 바짝 예민해진 상태로 길을 따라 걷던 우리는 길의 중간 즈음에 있는 빵집을 찾아냈다. 단팥빵, 소로보빵, 슈크림빵이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꽈배기가 하얀 설탕 이불을 뒤집어쓰고 포근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꽈배기를 골랐고 한 손에 하나씩 하얀 설탕이 잔뜩 붙어있는 꽈배기를 들고 나왔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꽈배기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현수의 말에 이어 어른이 되면 꽈배기 만드는 빵집을 가질 거라는 미애의 야망을 듣고 있노라니 나도 질 수 없어 어른이 되면 꽈배기를 한 트럭 쌓아놓고 먹을 만큼 부자가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점점 줄어가는 꽈배기에 친구들의 표정이 흡족한걸 보니 꽤나 어깨가 솟아올랐다.


꽈배기를 먹으며 우리는 그 동네에 있는 작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속에서도 나는 대장 노릇을 하며 친구들을 진두 지휘 했다. 숨바꼭질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 벌레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풀과 나뭇잎을 입에 물고 다니기도 했다. 무엇을 하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친구들과의 성공적인 옆동네 마실은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매화야~ 우리 이제 돌아가자. 너무 힘들어."

"알겠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음에도 또 놀러 오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 밑에 다다르자 내 손은 주머니를 바쁘게 훑었다. 나는 금세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현수야 너 혹시 돈 남았어?"

"아니. 꽈배기 먹을 때 돈 다 썼는데?"

"미애야 너는?"

"100원 있어"

"어떡하지? 우리 버스 못 탈 것 같아."


어이없게도 돌아가는 버스비가 남아 있지 않았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모아도 버스를 타고 갈 수 없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집까지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길도 몰랐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 차를 태워달라고 하자!'


왜 그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 방법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인도의 끝 경계석에 서서 다가오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차들은 내가 잘 안보였는지 계속 지나쳐 가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손을 흔들었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이니?"

"저희가 버스를 타고 놀러 나왔는데요.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어요."

"어디로 가니?"

"내설동이요"

"그래,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타라"


달리 방법이 없던 우리는 허겁지겁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자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아저씨는 잠시 말이 없더니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몇 마디 질문을 하던 아저씨는 더 이상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아저씨의 얘기를 들려줬다. 아저씨는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아들이 있다고 했다. 길을 잃은 것처럼 보여서 도와주시는 거라고 하면서 다음부터는 어른들하고 함께 나오라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멀게만 느껴지던 동네가 금세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곳에서 내린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급히 흩어져야 했다. 이미 뒷동산이 해를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매화야 내일 봐~!"

"현수야, 미애야 잘 가~ 또 놀자~!"


인사를 급히 나누고는 집으로 바쁘게 달려갔다. 텅텅 빈 주머니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잠시 가뿐 숨을 돌려야 했다. 마지막 깊은숨을 들이쉰 후 조용히 숨 죽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와 동생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엄마는 나를 보고도 특별히 화를 내진 않으셨다.


"홍매화! 너 어디 다녀오는 거야?"

"친구들이랑 뒷산에 가서 놀다 왔어요"

"매화야, 해가 지기 전에는 들어와야 한다."

"네, 엄마"


'휴.. 다행이다. 하마터면 엄마한테 혼날 뻔했어.'


요즘 들어 엄마가 혼내는 일이 줄어들었다. 웃는 얼굴도 자주 보였던 것 같다. 핏기가 없이 무표정하던 얼굴도 생기가 돌고 다시 처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엄마가 웃는 얼굴이 좋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