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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Jun 26. 2024

어쩌면 행복

3화

“여보세요. 어머 승호씨~”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는 내가 100점짜리 성적표를 내밀었을 때보다 더 행복한 듯 사뿐사뿐 날아다녔다. 엄마는 승호라는 사람과 자주 전화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잠들기 전에도 전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할 얘기가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중에 나보다 더 많은 얘기를 나누는 그 사람이 궁금했다. 엄마가 매일 통화하며 웃었던 것을 보면 반드시 다정하고 재밌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적어도 엄마가 승호라는 사람과 전화 통화 후에는 나에게도 미소를 보여줬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시기의 엄마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날이면 미스코리아처럼 이쁘게 꾸며 입고 나갔기 때문에 어린 나도 보통 친구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 날이면 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집에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 남은 나와 동생 대훈이는 엄마가 나가는 날이면 마음 놓고 온 동네를 누비며 친구들과 날이 저물도록 놀았다. 놀다 지쳐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러 진 상태로 잠들기 일쑤였기에 엄마가 늦은 시간에 들어온다는 것을 안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화롭게 거실에서 동생과 재밌는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씻지도 않은 몰골로 만화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두 남매에게 엄마가 곤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주 느리게 다가온 엄마는 차분히 많은 말은 늘어놓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 투성이었다. 아니다. 엄마가 어렵게 꺼낸 첫마디 이후로 멍해져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매화야, 대훈아. 너희들한테 아빠가 생길 거야."


엄마의 말에 나와 대훈이는 잠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엄마는 두 살 터울인 동생 대훈이를 낳고 아빠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 그 이후 줄곧 아빠 없는 아이로 자랐던 우리였다. 내 기억에 아빠의 모습이나 목소리는 물론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었다. 기억에도 없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단번에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아빠가 생겨서 기뻐했다기보다는 엄마의 옅은 미소에 반사적으로 기뻐할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던 것 같다. 무섭기도, 설레기도 했다. 그날 나는 알 수 없는 쿵쾅거림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빠가 생긴다니. 제발 자상하고 다정한 아빠가 오게 해 주세요.'


얼마 후, 나는 승호라는 이름의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상상하던 자상한 모습과는 달리 눈매가 독수리처럼 매섭고 눈썹 사이에는 엉덩이처럼 골이 졌다. 몸이 얇고 키가 커서 기린 같다는 생각에 신기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눈치가 빨랐다.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우리의 사이에 재빨리 끼어들어 인사하라며 소개했다.


“승호 씨. 여기가 우리 첫째 매화. 옆에는 둘째 대훈이에요. 매화야, 대훈아, 인사드려. 새아빠야.”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살 새아빠란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새아빠는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새아빠는 나와 대훈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장난꾸러기 골목대장에 공부도 잘 해내는 아이들. 툭하면 사고 치는 말썽쟁이.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말괄량이. 엄마는 내 얘기를 새아빠에게 모두 다 해준 것 같았다. 새아빠의 입에서 내 얘기가 줄줄 흘러나오니 창피하면서도 관심받는 느낌에 가슴 한 구석에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어색했지만 마음속 작은 불씨를 지피게 된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새아빠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아빠가 정식으로 우리와 함께 살게 된 지 이틀째 되던 날이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동네 친구들과 골목을 누비며 놀고 있었다. 친구들과 놀다 보면 해님이 달리기를 열심히 하시는지 금세 산 너머로 달려간다. 그날도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새아빠와 마주쳤다. 퇴근하는 길이셨던 것이다.


“새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그래 매화야. 매화도 친구들하고 즐겁게 보냈니?”


나는 새아빠의 인사를 어색하게 받으면서 새아빠의 손에 들린 커다란 봉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새아빠가 재빨리 말했다.


“같이 먹으려고 치킨 사 왔단다. 식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먹자!”


나는 대답 대신 새아빠의 손을 잡으며 내 마음을 표현했다. 치킨을 사주는 아빠가 드디어 나에게 생겼다는 생각에 덥석 손을 잡았던 것 같다. 새아빠가 사 온 치킨은 세상 어떤 치킨보다 바삭하고 담백했다. 나와 동생이 치킨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것을 보고는 흐뭇하셨던지 새아빠는 옅은 미소를 내내 지어 보이셨다. 눈치 없는 동생은 먹는데 한 눈이 팔려 있었지만 나는 새아빠의 마음 씀씀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후로도 새아빠는 종종 퇴근길에 맛있는 먹을거리를 챙겨 오셨다. 겨울에는 호떡이나 붕어빵, 국화빵을 사주셨고, 떡볶이나 꽈배기, 도넛 같은 간식도 자주 사 오셨다. 입이 즐거우니 마음도 행복해졌다. 나와 동생은 자연스레 아빠의 퇴근을 기다리게 되었고, 우리의 마음도 어느새 새아빠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다. 나에게 호통치며 혼내던 엄마의 모습도 새아빠가 온 이후에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엄마는 더 이상 나에게 매를 들지 않았다.


아빠가 생긴 후, 우리 가족은 정말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았다. 뭐든지 척척 해내는 아빠가 좋았다. 수영도 잘해서 여름이면 계곡이며 바다를 다니면서 수영도 가르쳐주셨다. 한 번은 바다에서 튜브가 뒤집힌 적이 있는데, 아빠가 잽싸게 나를 들어 올려서 허우적대지 않고도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겨울에는 내가 좋아하는 언덕에 썰매장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재밌게 놀 수 있게 해 주고, 강가나 호수로 가서 스케이트나 썰매도 태워주셨다. 처음 맞이한 생일에는 선물이 한가득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는 빵집에서 가장 큰 사이즈로 사 오셨다. 가장 좋았던 것은 아마도 아빠가 항상 내 편을 들어줬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빠는 우리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주었다. 아빠와의 시간은 매일 처음과 같이 설레고 행복했다. 정말 꿈만 같은 날들이었다.


"아빠, 나는 아빠가 우리 아빠여서 정말 좋아"

"아빠도 매화가 아빠 딸이어서 너무 좋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난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 거야"

"아빠도 매화랑 오래오래 살 거야"


그날도 행복했던 날 중 하루였다. 우리 가족을 태운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친척 집에 놀러 가는 길이었다. 아빠는 운전을 잘한다. 버스비가 없어서 손을 흔들던 나와 친구들을 태워줬던 아저씨보다 더 잘했다. 그날도 아빠가 운전하는 차는 고속도로를 매끄럽게 달리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나와 대훈이가 앉았고, 엄마는 앞에 앉았다. 아빠를 좋아했던 나는 아빠 뒷자리를 차지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가던 우리는 휴게소에 들렀다. 오징어구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다. 아빠는 잊지 않고 오징어구이를 사주셨다. 동생은 감자, 엄마와 아빠는 호두과자를 손에 들고 차로 돌아왔다. 엄마는 운전하느라 손이 부족한 아빠에게 호두과자를 손수 먹여주었다. 아빠는 입을 잽싸게 벌려 받아먹고는 엄마가 줘서 더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오징어 다리를 뜯어서 동생에게 주었다. 동생의 통감자가 먹고 싶어서 다리를 내어준 것이었다. 약간의 투닥거림이 있었지만 나는 통감자를 먹을 수 있었다. 아빠는 그런 우리 모습이 재밌었는지 호두과자를 줄 테니 감자와 오징어를 달라고 하며 엄마에게 신호를 주었다. 엄마는 손에 호두과자 두 알을 들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차 앞에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것은 우리 차를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엄마의 비명소리와 아빠의 '안돼!'라는 짧은 외침과 함께 잠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오징어와 감자, 호두과자가 차 안을 떠다니더니 그대로 나뒹굴었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내 머리 위로 도로가 쇠를 갈아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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