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장에 진입하기도 전에 시장이다.
인도(人道)의 반은 할매들이 점령했다. 인도의 나머지 반으로 사람들이 오간다. 길게 늘어선 할매들이 중앙시장 밖에서도 시장을 형성했다. 할매들은 웬만한 날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장사하러 나오신다. 그 돈 벌어서 어데 쓸 거냐고 여쭤보면 손주 준다 하시고 또는 병원비에 보탠다 하시고 그냥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돈 번다는 할매도 있다. 나물할매, 과일할매, 조개할매, 두부할매들은 각자 지정된 할매들 자리가 있다. 시(市)에서도 할매들을 건들지 못한다. 일단 할매들이 너무 많고 할매들이 억척스러운 견고함으로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할매 숲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저 할매의 고구마 오천 원어치를 사라, 저 할매의 콩나물 천 원어치를 사라는 주문이 들려온다. 늘 이런 식이다. 그러면 나는 그 근처에 있는 현금 인출기에 가서 현금을 뽑는다. 오늘도 현금 인출기에 갔더니 현금 인출기가 언니의 생일 네 자리를 입력해야 현금을 빼내어 준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현금 인출기에 입력해야 할 비밀번호 네 자리 수와 같았다. 아, 언니 생일이구나 오늘이! 어스름한 시각, 뒤늦게 알아차린 언니의 생일이었다. 언니의 생일 모월모일 네 자리를 입력했더니 동생이 되어서 언니 생일을 깜빡해도 되겠느냐며 수수료 오백 원을 더 지불해야 현금을 빼내 줄 수 있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심한 나를 인정하고 현금 인출기에게 오백 원을 더 주겠다고 하니 그제야 고약한 기계는 드르륵드르륵 제법 생색내며 현금 세는 기계음을 들려준다. 오늘이 언니 생일이라서 그런지 그 기계음이 마치 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소리같이 들렸다. 고운 한 줌의 가루가 되고자 언니가 들려주었던 그 마지막 소리도 기계음 이었다. 현금 세는 소리가 그렇게 들린 것은 오늘의 날짜가 현금 인출기에 입력되어진 탓일 게다. 현금받아내기가 이렇게 힘든 날도 있다니 괜히 나는 할매들이 야속해졌다. 현금 인출기가 마지막으로 빠트린 물건은 없는지 잘 살피라고 했고 안녕히 가라고 했다. 너라면 안녕히 가겠니라고 대꾸해 주려다가 기계한테 말해 뭐 해, 현금을 분명 다 챙겼다만 자꾸만 뭘 빠트린 것 같은 아쉬움과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그런 허전함들이 CCTV에 다 찍혔을 것만 같아서 얼른 은행을 빠져나왔다.
고구마 할매한테 미안했다.
오늘은 고구마가 퍽퍽해서 안 될 것 같애. 할매, 다음에 사줄게. 콩나물 할매한테도 미안해. 빽빽한 콩나물을 다음에 살게요.
현금을 뽑았으니 현금 한 장쯤은 어디다 좀 쓰고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씁쓸한 커피를 샀다. 카페 사장님께 현금을 내미니 거슬러 줄 현금이 없단다. 현금은 이제 할매들의 숲에서만 통용되나 보다.
사장님, 거스름돈 달아놔요. 저 아시잖아요. 내일 또 올 테니까 달아놓은 거 제하고 계산해요.
할매숲을 빠져나오는 길에 할매숲 다리 아래 흐르는 냇물에다가 그리움 같은 것들을 한참이나 쏟아내서 떠내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