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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 Nov 04. 2024

나의 아픈 아버지  '가재미'

문태준

김천 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 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나의 아버지는 육십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았을 땐 이미 말기로 진행된 상태였지만,  

우리 가족은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다.

하지만 모든 병원에서 받은 결과는 길어야 3개월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그나마 편하게 지내며 케어를 받을 수 있는

한방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켰다.

엄마는 생업을 뒤로 하고 아버지 옆에서 손수 식사를 챙기셨고

몸도 마음도 약해진 아버지는 아기처럼 자주 눈물을 보이셨다.   


두 달 뒤 한방병원에서는 집 근처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게

좋겠다고 했고, 그 말  끝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시골의 작고 좁은 병실에서

배에 찬 복수를 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시인이 말한 느릅나무 껍질처럼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 시를 읽으며 아버지의 파랑한 날과 함께  

나의 몇몇 허랑한 날들이 떠올랐다.   

마루에서 밥 먹다가 밥상을 마당으로 던지던 아버지,

술집 여자가 집에 찾아와 집안을 둘러보게 했던 아버지,

취한 날이면 사남매를 앉혀 놓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아버지.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외출할 때는 언제나 말끔한 차림이었고,

그 말끔함은 엄마의 누추함과 고단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아버지를 향한 미움을 키웠던 나.  

농사를 못 지어 가난한 것도,

엄마가 산딸기나 보리수, 옥수수를 시장에 내다 팔아야만 

했던 초라함도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른이 되어서는 그런 집이 싫어 먼 곳에 직장을 구하고,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외롭지 않기 위해서.

구질구질한 집을 생각하기 싫어서.

또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요란하고 화사한 영화와의 시간이 끝나고

어둠이 먼저 내 방에 스위치를 켜면 가만히 생각할 것도 없이

벽에 기대어 있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에게 나는 아픈 손가락이었을까, 

이런 풀리지 않는 문제를 떠올리면서.

오빠와 남동생, 여동생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둘째인 나를 대학에 보내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뒤늦게 스스로  대학공부를 한 나에게 엄마는 늘 미안해 하셨다.  

솔직히 그 말은 아빠한테 받아내야 하는 빚 같은 말이었다.


마흔이 넘은 어느 날 광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쏟아 내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심연의 막장에서 캐낸 석탄 값으로 방을 데우고 밥을 지어 먹었는데

학교 다닐 땐 그게 왜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친구의 아버지도 진폐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 돌아가셨고

두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친구와 나는 눈이 퉁퉁 부울 정도로 울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눈물의 의미를 굳이 말하지 않았다.

묵묵하게 부모로서의 삶을 살아내며,

뱉어야 할 말보다 삼켜야 할 말이 더 많았음을

살아보니 알 것 같아서였을까.


술의 힘을 빌려 했던 잔소리는 실은 자식을 향한 당부였고 안부였으며

나름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죽음 직전의 아버지의 모습보다

살아계실때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오래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새벽에 일어나 논과 밭으로 일하러 가던 아버지,

학교 가기 싫다고 했을 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던 아버지,

새끼줄에 자반고등어 한손을 묶어 좁고 기다란 길로 걸어오던 

그 눈빛을,

표정을, 

걸음걸이를,

영화의 롱테이크씬처럼 내 가슴에 찍어 놓을 수 있었다면.


파랗다 못해 시린 2월 하늘 아래 아빠를 묻고 내려오면서

나는 약속하고 또 약속했다.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 사람의 마음을 오래 알아가기 위해

시선을 쉬이 거두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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