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正道), 결과 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두 번째로 학교에서 가장 크게 배운 건 디자인 스토리텔링 (Design storytelling)이었다. 먼저 디자인 스토리텔링의 목적을 살펴보자.
스토리텔링은 우리가 디자인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디자이너로서 우리가 그들의 동기와 필요를 깊고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Storytelling creates a compelling narrative around the people we’re designing for so that we as designers can develop a deep and emotional understanding of their motivations and needs.
-The Power of Stories in Building Empathy
위의 정의에 명시되어 있듯, "디자인 스토리텔링은 하나의 완성된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경험을 줄 수 있을지 그들의 동기와 필요를 기반으로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각 단계별 과정, 방법론에 좀 더 포커스 되어있는 디자인 프로세스에 비해, 디자인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이 디자인이 도출되었는지, 나아가 그 안에서 어떻게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중간, 최종 디자인을 이끌어 내었는지를 담아내는 하나의 기승전결 짜임까지를 포함한다.
너무 세련된 완성 디자인만 넣은 건 포트폴리오가 아니에요.
여기에는 스토리가 없어요.
MHCI+D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육 개월쯤 지나서였을까, 포트폴리오 피드백을 요청한 나에게 내 멘토였던 구글 디자이너분이 해준 첫 피드백이었다. 스토리가 없다고? 나름 프로젝트 개요, 배경, 사용자 니즈, 리서치 내용도 넣었는데 뭐가 더 필요한 거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도 그럴 듯이, 나는 이미 학교를 오기 전 풀타임 실무 디자이너로 여러 해 일하고 있었기에 사실 학교에서 디자인 자체에 대해 크게 배울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디자인 프로세스도 대학시절부터 배워왔고, 글로벌 디자인 컨설팅 회사인 IDEO 사의 디자인싱킹 (Design thinking)으로 유명한 더블 다이아몬드 (Double Diamond) 또한 십여 년 전부터 디자인 방법론의 교과서처럼 들어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더 하라는 거지?
프로세스들이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로 이어지지 않아요. 여러 시안들도 있었을 거고, 시행착오도 있었을 텐데 여기엔 그런 내용들이 없어요.
그랬었다, 당시 내 포트폴리오는 그럴듯한 이미지들로 짜인 완성된 디자인에 앞단 프로세스들을 일부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한 번도 이직준비를 해 본 적도 없고, 풀타임 경력은 한 회사에서만 쌓았었기에 이직을 위한 한국의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어떤지에 대해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인턴쉽을 하던 시기, 학생들 사이에서 ‘우수 포트폴리오’로 추천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포트폴리오는 그래픽적 완성도가 높고 마치 제품, 서비스 팸플릿처럼 깔끔한 포트폴리오 들이었다. 이에 맞춰 나 또한, 디자인 프로세스를 다루긴 하였으나 ‘보기 좋고 세련된, 뭔가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이미지를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 맞춰 만들었고, 다양한 사용씬들을 추가해 포트폴리오를 완성했었다. 하지만 꽤 그럴듯해 보였던 내 첫 포트폴리오는 미국의 학교와 회사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왜 그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와 한국에서의 내 친구들이 동경하고 따라 했던 포트폴리오들은 효율성과 정답, 혹은 결과를 중시하는 한국사회를 닮아있었다. 누가 봐도 전문적이고 깔끔한 그래픽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지만, 정작 이 디자이너가 어떻게 이 디자인을 진행했고, 어떤 고민의 결과를 거쳤는지 그 여정은 불분명했고 주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촌스럽거나 어설픈 초기 디자인을 보여주기에 주저했고, 프로세스를 담은 페이지들조차, 결과물을 만든 뒤 재가공된 프로세스 이미지 몇 장이 그것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MHCI+D 프로그램을 하며 좋은 포트폴리오라고 추천받은 포트폴리오들에는 이 디자이너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 결과에 이르렀는지가 하나의 서사로 투명하게 공유되며 각 과정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시행착오와 그 안에서 배운 점, 변경된 디자인들이 모두 녹아있었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정도(正道)와도 같은 더블 다이아몬드. 사실 현업에서의 디자인 과정은 저렇게 깔끔하게 나눠지지도,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때로는 리서치 없이 바로 디자인 시안을 잡다가, 유저 테스트가 필요한 부분이 생겼을 때 리서치를 새롭게 진행하기도 하고, 기껏 잘 진행하고 있던 콘셉트가 엎어지며 새로운 콘셉트들을 도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은 결국 자양분이 되고 하나의 방향이 되어 디자인을 완성한다. 그리고 포트폴리오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의 실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네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어떤 배경에서, 어떤 임무를 가지고, 어떤 챌린지를 해결하며 결론에 도달하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디자인 의사 결정 (Design decision making)을 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
우리의 삶을 디자인함 또한 깔끔한 더블 다이아몬드보다는 구불구불 복잡한 곡선을 닮아있다. 때로는 전혀 효율적이지 않아 보이는 길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여서 갑자기 새로운 길을 탐색해야 하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비슷한 결론에 이른 것 같아도 각 개인이 그린 삶의 경로는 모두 다양하다.
파이널 디자인만큼이나 그 디자인 여정을 중요시하고 궁금해하는 미국의 학교와 회사들처럼, 우리의 사회 또한 삶을 바라봄에 그 사람이 이뤄낸 결과에만 포커스 하지 않았으면 한다. 실패도 시행착오도 공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되어, 그 하나하나의 궤적이 결국 어떻게 그 사람의 인생을 디자인하게 되었는지를 좀 더 너그러이 봐주었음 한다. 혹여 어떤 이가 정도를 걷고 있지 않고 돌아가는 길 위에 있어 보이더라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 아직 파이널 디자인을 하지 않았어도 괜찮다. 정도(正道)가 아닐지라도, 명확한 더블 다이아몬드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괜찮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의 리드 디자이너들이며 독자적인 방법들로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