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그는 십자가인가
운명(運命)이라 할까, 숙명(宿命)이라 할까 고민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보다는 흐름의 여지를 가지는 운명이 덜 무거워 보여 운명이라 픽!
운명이란 무엇인가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삼천대천을 그리 날아다녔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죠. 성취를 위해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손오공의 활협이 삶이라면 부처님의 손바닥이 운명인 게죠. 인간은 신이 내린 운명 속을 삶이란 이름으로 개척해 가는 무대 속 주연입니다. 손오공의 무대가 삼천대천세계라면 우리 무대는 지구라는 행성인 셈이죠.
운명이란 인간이 삶으로 개척해 갈 신이 내려주신 인생의 베일이며 나는 모르고 신만이 알고 있는 각본입니다.
운명의 시작
운명은... 탄생의 순간, 울며 짊어진 명입니다.
'고통과 인내의 바다에 던져진 걸 축하합니다!' 박수받으며 태어난 값입니다.
성공할 운명이나 비렁뱅이 운명이나, 행운과 불운의 파도타기가 운명인 게죠.
태어날 때는 시끌벅적 요란하게 왔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미래는 인간을 두려움 속에 가두고 겸손하게 운명의 고락(苦樂)을 맞이할 것을 요구하죠. 착하고 성실한 인간은 말없이 적응하며 순응해 갑니다. 서서히 그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아 갑니다.
무거운 운명의 십자가... 순응할 수 있을까
운명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명이라 그럭저럭 순응하며 살아야 함을 압니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는 없습니다.
운명도 삶의 모습 따라 흐름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못 보고 모를 뿐이니까요.
그러나, 삶의 패턴이 고정되어 운명이 절대적으로 흐를 수 없는 예측가능한 운명이 있습니다.
운명의 수레는 탄생역에서 시발되어 죽음의 역에서 멈춥니다. 중간 역에서 내릴 수도 없는데 현생의 긴긴 역이 암흑의 동굴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있습니다.
평생을 장애로 살아가야 하는 가여운 운명과 함께 심적 장애를 끌어안고 사는 가족의 운명을 저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무거운 십자가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게 운명이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신의 뜻이고 뭐고 불공평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일생을 바깥세상이 아름다운지도 모르고, 성장으로 얻는 희열로부터 완전 배제 당한 장애 가족을 보며 그 가족들도 고통스럽게 지냅니다.
그를 벗어날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보다 쉬울 순 있겠지요.
장애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니 오히려 낫지 않겠냐고요? 그도 울며 살아보려고 태어난 귀한 생명입니다. 돌산이든, 격랑의 바다든 뭐든 맞닥뜨려 선택하고 느껴볼 자격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를 보는 자는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 나무도 꽃도 풀도 작은 벌레들도 새들도 커다란 동물들도 생겨난 대로 살아가듯, 사고(思考)를 가진 인간도 운명대로 살아가라 합니다.
분명 신은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품어 이 세상에 보냈다 했습니다.
설리반을 통해 당신의 뜻과 영광을 나타내려고 헬렌 켈러를 보낸 것처럼, 누군가를 십자가 삼아 주변의 누군가를 살리려 한 신의 뜻일까요?
십자가는 인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종래는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순응에 대한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신의 뜻, 십자가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그 속의 빛을 찾아라
위라클의 박위를 아십니까?
한 스텝이 꼬여 남은 생을 중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운명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현재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그것은 부활입니다. 시크릿의 멤버 여자 친구(송지은)를 만난 것도 신의 뜻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이 둘을 이어주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이라죠. 박위 님도 그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믿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이해,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결코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이 변화하면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분명 박위 님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을 것입니다.
'삶과 운명'은 참으로 쉬운 듯하지만,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리 말하는 본인도 가능하다 말 못 하지만 우리는 대단한 인간이고 박위 님의 희망 메시지는 분명 빛이라 믿습니다.
그는 의식과 영혼이 사랑의 진리 속에서 구원받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우슈비츠 경험을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빅터 프랭크는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라고 했습니다.
극한의 절망 상황에서의 구원은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요. 그의 체험에서 나온 구절입니다.
사랑은 곧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사랑하며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운명을 극복하는 힘이 사랑입니다.
쓰다 보니 참 무거운 주제임을 알겠습니다. 삶과 운명에 대한 지극히 제 개인의 생각이라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늘 생각합니다. 앞날에 주체 못 할 커다란 장벽이 나를 기다린다면 그 운명을 어찌 받아들이게 될까를요. 운명을 받아들여라 마라고 말할 자격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이런 사유를 하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정신의 성장과 믿음, 그리고 마음 근력을 기르면서요. 그러해도 불운을 맞을 때는 분명 퀴블러 로스의 심리 변화를 겪을 것입니다. 부정하고 분노하겠죠. 그러다 지쳐 타협하고 우울에 빠져 헤매다 수용할 겁니다.
모든 운명의 절망 속에 빠져 계신 분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