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과 그 기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똥철학 같지만, 이 몸과 마음이 깨지면서 영혼으로 흡수한 편린들을 종합하여 이해한 산물이기에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60년을 살아온 내가 이제야 삶을 이해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깊은 통찰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음을 알기에 삶과 그 의미를 아는 데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말하고 싶습니다.
삶을 알기 전 나는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살기 위해 독서와 묵상을 했고 성찰과 긴 사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삶과 인간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삶의 이해는 인간존재의 이유와 깊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3년의 시간 동안 늘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나 누구예요?'
'나 왜 여기 있어요?'
물음에 대한 답인 듯, 우습게도 삶이라는 인생의 베일이 살포시 거두어져 날아올랐고 확연한 모습을 본 나는 우울에서 벗어났습니다.
지금을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고,
탄생부터 시작된 모든 스토리가 나의 삶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시작이 있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성 어거스틴, 4세기)의 이 엄중한 말에 깊게 공감합니다.
창세기 신의 창조로부터 한 세기를 살 인간의 탄생까지,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모든 삶의 시작은 이 세상에 온 탄생의 시점부터였고 눈과 귀,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도 시작되었습니다. 시작된 세상의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나를 태운 시간의 수레가 이 세상의 룰에 따라 움직였고 삶이라는 테피스트리가 짜이고 삶이라는 숲이 울창해졌고 삶이라는 강이 흘러갔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삶이었음을 늦게야 알았습니다.
삶은 탄생과 동시에 짊어지는 당위적 의무이며 내 탄생의 이유는 살아내라는 명령인 동시에 살아내야 하는 의무였습니다.
나는 그저 살아내라는 소명을 받고 인간이란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온 생명체였습니다.
'삶'에 대해알고 나니
'난 도대체 어떻게 산 것인가'하는
반성과 후회를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진정 삶에 대한 이해는 반성과 후회만의 결과를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이제 반성은 하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반성의 결과는 현재와 미래의 삶에 긍정의 이정표가 될 수 있지만, 후회는 나 자신을 비참하게만 합니다.지금 살아야 할 삶이 있고 더 중요함을 인지했습니다.
삶의 자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에게 삶이란, 사는 일이 3분지 1, 그리고 3분지 2는 살아지는 일인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대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도 아니고 내 성찰만으로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세 유형으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긍정의 부류는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보고 한 번뿐인 인생, 잘 살아내고자합니다.
'생 떽쥐베리가 '삶은 발견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지. 삶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야. 삶의 주인공이 나니까 멋지게 살아보자.'는 자기 주도적 삶을 만들어갑니다.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를 떠나 즐거움을 찾으며 살고자 합니다.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면 되는 거지. 일단 메멘토 모리는 나중에, 카르페디엠만 기억하고파. 죽음이 온다는 건 아니까 목숨 붙어있는 동안 더 즐기며 살자.'
즐거움을 찾지만, 퇴폐적 향락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내 인생의 한계는 없어. 목표를 정하고 힘차게 전진할 거야. 목표점에 도착했네.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야지.'
이들은 나날이 새로운 도전으로 내적 자아를 만족시켜 갑니다. 현실에서 어찌어찌하든 성공하고 삶을 영위하는 부류입니다. 행복한 삶은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며 몫이라고생각합니다.
이도 저도 삶의 성찰 없이, 태어났으니까 그저 열심히 살아내고자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중요해. 딱히 뭘 생각하며 살아야 하나. 닥쳐오는 위기와 문제들을 이겨내기도 버거운데 딴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나. 이 또한 지나가는 것은 알고 있어.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시간은 다 흘러가게 되어있는 거야. 그럭저럭 대충 사는 거야. 사는 것에 집중하면 되지.삶이 뭐냐고? 그냥 살아내는 거야. 죽을 때까지 이 몸이 감당해 내야 할 과제인 거지.살아내다 보면 다 지나가. 결국 삶은 자신의 의지로 살기보다 흐르는 운명에 실려 가는 거지.'
개척하는 삶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사는 부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부정의 부류는 억지로, 죽지 못해 삽니다. 억지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삶은 어떨까요?
'원하지 않았는데... 난 이곳에 와있네.
누가 여기로 보냈을까. 우주적 신비로 태어난 거 맞아? 근데 삶은 왜 이리 비루한 거야? 심신이 편할 때가 없어.'
분명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삶은 오르기만 하는 산이고 건너야만 하는 강입니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데 몸은 지치고 고단합니다. 이젠 그만 가고 싶어 하고 오르던 산 중턱에 쉼터가 있다면 그것은 사막의 오아시스일 것이라고 예단하여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저 잠깐의 휴식으로 재충전하고 다시 오르기만 하는... 삶이란 그런 고달픈 여정이라 생각합니다.
'오르는 산이 푸른 숲이라면 좋으련만, 깨몽~ 왜 나의 산은 늘 돌산이지? 내가 건너는 강이 좀 한가롭고 얕은 강이면 얼마나 좋아! 늘 소용돌이치는 강이야. 무섭고 두려워! 건너갈 때 쓸 튼튼한 장비도 없는데 말이야. 산은 꼭 오르고 강은 꼭 건너야 해? 포기하면 안 될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리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삶은 꼭 이런 걸까요?
삶에 대한 시선... 지금을 사세요
사람과 삶은 하나입니다. 사람에서 홑소리 'ㅏ'만 빼면 삶이고 사람을 계속해서 빠르게 발음하면 삶이 됩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사람 자체가 삶덩어리임을 느낍니다. 삶은 경건히 순간을 살면 된다 합니다. 뭔가 굉장한 듯하지만, 지금 순간순간의 삶이 기억되어 거창하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삶을 사람이라 보면 엄중하지만, 지금 순간을 사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삶이란 사람이며, 살아가는 일이며, 살아온 스토리입니다. 스토리는 스토리일 뿐, 삶은 지금 순간을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집니다.
삶의 덩어리는 '나'라는 존재 하나로 족합니다. 긍정의 스토리는 낫지만, 과거의 부정스토리를 덩어리로 끌어안고 가거나 미래의 삶을 불안 덩어리로 짊어진다면 불행한 삶이 됩니다.
삶을 살아가는 시각을 바꾸세요. 시선을 지금에 두고 바라보세요. 삶이 살만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늘 지금 순간을 살라하며 인간은 순간순간 삶으로 떠오르는 존재라 했습니다.
"순간의 삶에서 떠오르세요!"
삶은 신에게 받은 선물 같은 소명입니다. 인간, 우리는 그 속에서 밝게 빛나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카잔차키스의 저서 '그리스인 조르바' 속 주인공 조르바는 인간인 자신을 짐승이라 표현합니다. 먹고 배설하는 욕구를 채우며 사는 단순한 짐승이라 합니다.
살라는 명을 받고 떨어진 세상에서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으로 단순하게 순간을 살다 간 그의 말을 인용하며 삶의 이해를 마치고자 합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신명 꼴리는 대로 삽니다. 기왕 골로 갈 거면 화끈하게 가잡니다.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두려움 없이 꼴리는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가 삶을 제대로 사는 진정한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