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가 영업을 마친 밤 12시 이후에는 카페 여사장은 또 근처에 있는 가라오케에 가서 손님들의 신청곡을 틀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음악 DJ 일을 세컨드 잡으로 하고 있었는데 카페 일이 끝나면 딱히 갈 데가 없는 나를 그 가라오케에 같이 데려가서 바텐더로 일하게 해 주었다.
가라오케는 매일 출근하는 것은 아니라 나가는 요일이 정해져 있었고, 일이 없는 날 카페 영업을 마친 뒤에는 카페에서 우리끼리 술을 한잔 하거나, 근처 밤새워하는 식당에 가서 뒤늦은 끼니를 하며 소주 한잔씩 했다. 장사가 잘 되어 매상이 많이 나왔거나 가끔 기분을 내고 싶다거나, 혹은 누군가의 생일이 있을라치면 우린 동대문이나 남대문 등 24시간 돌아가는 지역의 시내로 나가 기분을 풀곤 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술은 점점 늘어만 갔다.
처음 가출해서는 이 집 저 집, 친구네를 옮겨 다니며 잠을 잤었는데,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잠도 사장의 집에 가서 자게 됐다. 중성적인 스타일에 성격도 시원시원했던 사장은 얼마 벌지도 못하면서 뭐 하러 숙식에 돈을 쓰냐고 핀잔을 주며 자기네 집에 와서 자라는 것이다. 나이차가 많지도 않았던 우리는 일 끝나면 누나 동생으로 편하게 지내자는 말이 참 고마왔다. 난 그렇게 돈을 벌며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
원래 성격이 그랬던 건지는 스스로 알 수 없으나, 당시 난 서비스 마인드가 투철했고 내가 하는 분야에서 뭔가 프로페셔널하게 일하고 싶었다. 그렇게 손님들의 기분을 미리 캐치해서 재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가라오케 사장님의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었고, 영업이 끝나면 그곳 사장님과도 술 한잔 하며 인생에 대한 나름의 가르침도 들으면서 그렇게 친분을 쌓아갔다. 카페 사장 누나와 가라오케 사장님, 셋이서 노래도 엄청 부르며 우리들은 친해졌고, 나의 노래 취향과 선곡에도 두 사람은 매우 흡족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카페에서 일을 마치고 가라오케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카페 문을 닫으려는 찰나, 평소 다니던 무리와는 다른 남자들이 카페로 들이닥쳤다. 몸에 문신이 가득하고 험악한 표정을 한 그들은 누나에게 대뜸 돈을 요구했다. 누나는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그들과 대치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누나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장님, 여기 유흥업소 바지 사장이잖아. 시원하게 돈 좀 내놔야지." 한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바로 경찰에 신고하려 했으나, 누나는 손짓으로 말리며 대신 나에게 가게 뒤로 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 신호에 따라 가게 뒷문으로 빠져나갔지만, 누나를 두고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이미 형이라고 친숙하게 부르던 가라오케 사장님께 연락해 즉시 가게로 와줄 것을 부탁하고, 나는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형님이 도착했지만, 남자들은 이미 돈을 강탈한 상태였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그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다행인 것은 형님이 수소문해서 그 무리들이 누구인지 확인을 했고, 이번 일은 그냥 서로 넘어가지만, 내가 아는 동생들이 하는 업소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주셨다. 뺏긴 돈까지 찾아주시면 안 되냐고 형님께 물어봤지만, 앞으로 확실히 편하려면 그쪽 체면도 좀 살려줘야 한다는 말이었고, 큰돈을 뺏긴 건 아니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암튼 누나는 그냥 피하라 했다고 피하지 않고 연락을 취해 형님을 부른 나에게 고마워했고, 우리 들의 유대감은 더욱 강해졌다. 어느새 난 단순한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그들과 가족처럼 가까워졌다.
내가 가라오케에서 DJ로 자리를 잡을 무렵, 내 주변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손님들 사이에서 내 이름이 하나 둘 알려지고, 어느새 나를 찾는 단골들도 생겼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번만 가던 것을 이제는 카페 영업을 마치면 가라오케까지 매일 나가게 되었다. 사장 누나는 내가 능력을 인정받는 이 상황을 흐뭇해하면서도, 때때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일을 너무 과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이상한 사람들과 엮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하며 DJ일은 쉬엄쉬엄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난 그저 일에 몰두할 때 세상에서 잠시나마 도피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가게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연희였고, 첫인상부터 매우 매력적이었다. 연희는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그 누구와도 쉽게 어울렸다. 그녀가 들어오면서 가게 분위기는 한층 더 밝아졌고, 나 또한 그녀와 함께 일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던 중, 가라오케 손님 중에 연희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동대문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로, 처음부터 연희에게 대시를 했다. 나는 연희를 지켜보며 그녀가 그 남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했다. 연희는 그 남자의 호의를 미묘하게 받아들였고,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어쩐지 불안을 느꼈다. 사장 누나는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그런 상황을 보며 나도 모르는 채로 어느새 연희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동료 사이의 것만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연희와 그 남자의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마침내 연희는 그와 함께 새로운 길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녀는 그 남자의 도움으로 대학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허전함을 느꼈다.
연희가 떠나는 날, 난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연희가 떠난 후, 나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연희에게 호감이 있긴 있었지만 나 스스로도 그것을 이성에 대한 감정으로까지 의식하거나 하진 않았었고, 일하면서 자주 같이 지내고 있으니 서로 친하게 지내는 상황으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연희에게 대시하는 나보다 더 능력 있어 보이는 남자의 등장에 연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자각했지만, 그것은 더 힘센 수컷이 나타났을 때 반사적으로 느끼게 된 돌발상황이었지,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깊게 사랑하고 있는 감정 또한 아니었음을 느꼈다.
다만,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전하는 것은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마 이때부터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 연희에게 떠나지 말라고 했다면 어땠을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부탁하고도 결국 연희가 떠났다면 그건 하나의 상처가 되었을 것이고, 떠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녀에게 잘해주지 못한다면 그걸 어떻게 보상한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당시의 상황은 능력 있는 사람이 그녀의 앞길을 케어해 주겠다는데 가진 것 없는 내가 말릴 수도 없고, 말려서는 안 될 일이었음은 자명하다.
그런 저런 일들이 있는 와중에도 난 낮에는 학교에 출석하느라 빠짐없이 나가긴 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말이다. 어머니는 나를 찾으러 학교에도 수시로 들이닥치셨지만, 그럴라치면 난 어떻게든 친구들을 통해 미리 얘기를 듣고 잽싸게 도망을 쳐버리곤 했다. 친구들은 자신들은 못하고 있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응원하고 싶은, 그런 어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붙잡아 두고 어머니에게 인도하는 것이 진정 도와주는 것일 텐데..
그때는 나도 친구들도 너무 어렸다. 몇 차례 계속 속 썩이는 자식 놈 검거에 실패한 어머니는 차츰 학교로 찾아오지는 않게 되셨고, 난 그렇게 집에서 떨어진 채로 이상한 이중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