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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못할까

시지프스의 사랑: 반복되는 부조리와 행복

by 자크슈타인


세상은 사랑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속삭인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주변에 지나가는 커플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고, 우리는 그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 사랑에 기꺼이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사랑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폭풍이 되어 우리를 휩쓸고, 되돌아보면 남은 것은 덧없는 상처와 텅 빈 마음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왜 상처받으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그 아픔에 진저리 치면서도 기어이 다시 그 길을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제 운전을 하는 차 안, 꽉 막힌 도로 위 정차 중에 거리에서 다투고 있는 한 커플을 보았다. 꽤나 막히는지라 우연찮게도 제법 긴 시간 그 커플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고, 남자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러다 또 버럭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분명 뭔가 트러블이 있는 상황. 왜 싸웠을까, 남자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이별까지 얘기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잠깐의 갈등일까. 궁금증이 일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차가 다시 달려 그들을 지나치기 전에 모쪼록 다시 손잡고 다정히 걸어가는 화해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 자신을 의식한다.


사랑이란 참 묘하다. 우리는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아니 상처받기 때문에 더욱 간절해지는 것 같다. 뭐랄까, 잠시나마 가질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들의 ‘완전한’ 순간을 바로 사랑이 주기 때문은 아닐런지.


그렇다. 어쩌면 사랑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완전함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을 통해서 확장되는 나, 혼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의 깊이, 예상치 못한 기쁨과 채워짐의 순간들. 그렇게 사랑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더 연약하게도, 때로는 더 용감하게도.


계속해서 되묻는다.

상처가 뻔히 보이는데도 우리는 왜 사랑에 목말라하고, 또다시 사랑을 하려 하는 것일까. 그 사람과 닮은 눈빛 하나만 마주쳐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 누군가의 문득 들리는 목소리만으로 저릿해지는 가슴. 지난 계절의 바람결에 묻어 있던 향기 하나에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해 보았는가.

사랑은 때때로 병처럼 찾아와 한 번쯤 마음속을 텅 비어버리게 하고선, 때로는 또다시 살아보게끔 만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은 상처받을 거라는 것을.

끝내는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바보같이 또다시 누군가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사랑한다.


그토록 아팠으면서도 다시금 살아보겠다는 마음에서 또다시 사랑이 시작된다면, 어쩌면 사랑이란 상처를 껴안고도 기어코 살아내겠다는 인간의 가장 완고한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두 번 다시는 사랑 같은 거 안 해.”


이별 후에 우리는 사랑에 진절머리를 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또다시 사랑 앞에 무너진다. 다시 누군가를 바라보고, 다정한 눈빛, 스쳐 지나간 손끝, 우연한 대화 하나하나에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 버린다. 알면서도 반복하는 것. 예상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다가가는 것.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바보같이 다시금 되풀이하기에 사랑은 이토록 아름답고도 아픈 것일까.


인간은 신체적인 나약함을 협동과 단합으로 극복해 온 영장류 진화의 산물로, 그래서 사회적 존재라고도 불리운다. 그와 달리 수많은 야생의 동물들은 어미에게서 태어나 짧은 어린 시절을 지나면 곧바로 독립해 잠시 동안의 짝짓기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홀로 살아간다. 눈 덮인 황량한 고산지대의 광대한 영역을 홀로 살아가는 설표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 스산한 풍경과 평생의 외로운 삶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느껴지는 고독감에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인간은 고립되어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다. 때로는 바보 같더라도 결국 이성보다는 ‘연결’을 향한 갈망에 더 충실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 '함께'에 이미 이별의 가능성이 품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다. 때로는 오해와 침묵이 무시로 갈라진 틈을 만들고, 때로는 너무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망설이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그것을 소유하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 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자주 목도한다. 상대방을 통제하고, 감정을 주무르려 하고, 심지어는 시간마저도 붙잡아두려 끝없이 집착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나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궁금해하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거울에 비친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고, 손에 쥐면 쥐려 할수록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그저 흘러가는 감정의 물결일 뿐, 사랑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집착'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우게 되고, 그 족쇄는 결국 아픔의 씨앗이 되어 이별의 싹을 틔운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


사랑은 본디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것임을.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프지만,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란 걸 알기에 더욱 사랑이 가슴 아픈 것일 게다.


잠시 마주 앉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고, 어떤 하루의 풍경을 같이 보며, 서로의 세계를 잠시 동안 공유하는 일. 사랑의 본질은 어쩌면 ‘함께 존재했었다는 경험’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아프게 했던 사랑의 순간들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아픔뿐 아니라 기쁨, 설렘,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이로운 경험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상처 역시 사랑의 일부였고, 그 상처를 통해 우리는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으며 삶의 깊이를 배우게 되었다. 그 경험들이 쌓여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완성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우리가 겪었던 사랑은, 결국 소유되지 않았기에 더 빛났던 것이 아닐런지. 잡히지 않았기에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사랑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과 마주한다. 완벽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사랑을 갈망하고, 그 불완전함을 채우려 하지만 결국 다시 아픔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타인의 불완전함 또한 포용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 것이고,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 게다.


인간은 원래부터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그 불완전함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기에, 누군가의 눈빛 안에서 자신이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느낄 때, 그 순간의 포근함과 충만함은 그 무엇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가지며 자존감을 최대치로 충전시켜 준다. 상처는 아프지만, 그 상처를 감수하며 얻은 ‘연결’에의 충만감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깊고 뜨거웠을 테다.

사랑은 그래서 아름답다. 깨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더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돕기에 말이다.


사랑은 끝날 수 있다. 아니, 언젠가는 끝나 버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다가오고, 함께 나눈 말들과 시간들은 흐릿한 기억 속으로 덧없이 사라져 간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전부 잊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론가 흐르고 흘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이고 그러다 문득, 누군가의 손길 한 번에 기억 저편의 따뜻함이 되살아 날 수도 있겠지.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 하나에,

익숙한 음악 한 구절에,

함께 즐겼던 음식의 냄새를 통해

그 모든 기억과 느낌이 생생히 살아나는 경험.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을 하는 행위는 아파도 좋으니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되는 가장 이기적이면서도 생존본능을 따르는 인간적인 선택일지 모른다.


사랑은 결국, 다시 살아보겠다는 용기에 다름 아니다.

아프지만, 그 아픔만큼 더욱 깊이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생히 일깨워 주기 때문으로.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잔인하다.

사랑은 완벽하지 않기에 아프고, 그래서 더 간절하다.


우리는 알면서도 다시 사랑한다.

상처받고 고통받더라도,

그 상처 속에 한때 존재했던 아름다움을 기억하려.


사랑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고통스러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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