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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Aug 12. 2024

'콘택트'와 '삼체'를 통해 본 철학적 고찰

우주의 거울 속 인류의 자화상


인류는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주의 신비를 상상해 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완벽한 질서로 가득 찬 곳으로 여겼고, 중세 이슬람의 알-가잘리는 우주를 신의 창조물로 해석했다.  인도철학에서의 우주적 생명관은 인간이 끊임없이 신과의 내재적 관계성 속에서 인간 본연의 실존을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한편, 자연에 내재하는 균형과 조화를 감지하고,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사는 삶을 추구하도록 정신의 고양과 심신의 정화를 위한 전인적인 삶이 바람직하다고 가르쳐 왔다.  근대에 이르러 유럽에서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혁명적 발견은 인류의 우주관을 뒤흔들었고, 이제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첨단 기술을 통해 우주를 직접 탐사하게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력을 온전히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은 지구의 자원을 남용하며 환경을 파괴해 왔고, 이제는 우리 인류가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사람들은 지구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우주 탐사 기술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1977년에 발사된 보이저 2호가 이제야 태양계의 경계를 벗어났을 뿐이다.  지구에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가 고조되어 심각한 현실로 닥쳐오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선진 각국들과 일론 머스크와 같은 기업가들은 우주에서 자원을 채취하거나 화성 이주 계획을 세우는 등 지구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초보적인 시도들이 과연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이러한 도전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그저 지구에서 벌어진 문제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일 뿐인 건 아닐런지.  이와 같은 시도는 인류의 끝없는 호기심과 탐험 욕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간은 신대륙과 대양을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려 하며, 이제 우주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전에 우리의 유일한 거처인 지구가 더 이상 인류를 버티지 못하고 우리를 재앙으로 내몰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들은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의 본질보다 앞서 있다면, 우리 인류는 지구라는 존재(환경)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고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고등한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그들이 존재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자신들의 행성을 망가뜨려 새로운 개척지를 찾고 있을지, 혹은 우리 인류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그들의 행성과 공존하며 순수한 탐구심으로 우주를 탐사하려 하고 있을지를 말이다.


우리가 지구 밖으로 시선을 돌려 우주를 탐사하려 하듯이, 고등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도 능히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지구를 탐사하거나 방문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외계 생명체의 존재와 그들이 지구를 방문할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스티븐 호킹 박사는 외계 생명체의 탐사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이는 무대만 다를 뿐 인류가 과거에 자신보다 열등한 문명을 정복하고 파괴해 온 역사를 반영한 인간 수준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예측이다.  반면, 칼 세이건 교수는 외계 생명체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지구를 방문할 때 평화적인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낙관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철학적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겠는데, 여기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상이한 시각으로 풀어낸 두 편의 소설이 있다.  칼 세이건의 <콘택트>와 류츠신의 <삼체>,  이 두 작품은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는 있지만, 그 접근 방식과 철학적 함의는 매우 다르다.


조디 포스터의 리즈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칼 세이건의 '콘택트'는 외계 생명체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외계인들은 인류에게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을 전달해 주며, 인류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먼 우주로의 여행을 가능케 하는 장치의 설계도까지 보내준다.

이는 장 자크 루소의 '자연 상태'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에 가깝다. 루소는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며, 문명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계약이 인간의 본성을 왜곡했다고 보았다.


칼 세이건 교수 역시 외계 생명체가 우리와 협력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으며, 그들과의 교류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에 보이저호에 골든 레코드를 실어 보낸 것이다.  이는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주장한 '영구 평화론'을 떠올리게도 한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영구적인 평화를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의무로 보았다. '콘택트'의 외계인들은 이러한 칸트의 이상을 구현한 듯이 보였다.


칼 세이건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실제 믿음과도 일치한다. 그는 외계 문명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파괴적인 충동을 극복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문명의 존속기간에 대한 예측과도 연관되는데, 자기 파괴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한 고등 생명체가 먼 외계로의 우주여행이 가능할 때까지 자멸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한다. 밀은 인류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더 나은 도덕적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칼 세이건이 그린 외계인들은 이러한 도덕적 진보의 정점에 있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콘택트'에서 외계인들과의 접촉은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이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인간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인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의 확장으로 볼 수 있겠다. 인류는 더 이상 지구라는 제한된 환경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확장, 광활한 우주의 일부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존재 방식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으로 그려진다.



반면 류츠신의 '삼체'는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하고 어두운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관점을 바꿔 거꾸로 생각해 보자. 위에서 제시한 하이데거가 인간 존재를 '세계-내-존재'로 정의한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세계와의 관계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래 살고 있던 지구와의 관계를 무시한 채 다른 세계로의 '도피'를 시도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구에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외계인들은 인류에 대해 적대적이며, 지구를 정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토마스 홉스가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사회계약론을 주장하며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Bellum omnium contra omnes, The war of all against all)' 상태를 우주적 규모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로 보았는데, '삼체'에서의 우주는 더 강한 자가 다른 존재들을 파괴하고,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는 삭막한 곳이며, 삼체의 외계인들 역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타 행성의 생명을 말살시키려는 존재들로 그려낸다.


'삼체'의 세계관은 다윈의 진화론적 사고를 확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우주는 자원이 한정된 냉혹한 환경이며, 모든 문명은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의 도덕과 윤리는 우주적 규모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생존을 위해 우리의 가치관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삼체'는 또한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도덕적 진보를 동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홀로코스트와 전쟁을 통한 살육이 한창이던 2차 세계대전의 와중, 기술 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왜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가공할만한 야만 상태에 빠졌는지를 밝히고자 한 그들은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성을 억압하고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삼체'의 외계인들 역시 기술이 지구의 인류보다 발전했을 뿐, 이러한 경고의 극단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두 소설의 대조적인 시각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의 기회를 준다.  '콘택트'가 제시하는 낙관적 비전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동시에 그러한 희망이 현실적인지에 대한 의문을 동시에 제기하며, 반면 '삼체'의 비관적 전망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지만, 동시에 그러한 비관론이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낳는다.


이 두 작품은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과거 신대륙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범선을 타고 오는 유럽 사람들을 보고 외계의 존재, 자신들의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 예언되었던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 혹은 '신'으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무대가 우주로 확장되었을 뿐.  우리가 상상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떠올려 보자. 우리는 우주라는 광막한 대지 위의 조그만 동굴 속에서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보는 외계인의 모습은 실제 외계인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희망과 두려움의 그림자가 아닐지.


우리의 우주 탐사와 외계인에 대한 상상은 결국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현대 과학기술이 가지고 있는 가공할 위험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책임의 원칙: 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Das Prinzip Verantwortung)』 를 통해, 이제까지의 전통윤리학에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문제만 다루어 온 것에 대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까지 질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하고, 미래윤리의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즉 우리가 미래 세대와 지구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우주 탐사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지구 밖까지 함부로 훼손시키지 않도록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되어야 한다.


20세기 프랑스의 카톨릭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와 '소유'를 구분했다.  광활한 우주 속 작고 창백한 먼지 한 톨에 불과한 우리가 감히 우주를 '소유'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주와 '함께 존재'하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며, 그것이야말로 지구 역시 계속해서 살릴 수 있는 방향일 것이다.



'콘택트'와 '삼체'는 단순한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미래,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과연 칼 세이건이 꿈꾼 것처럼 평화롭고 협력적인 우주 문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류츠신이 경고한 것처럼 냉혹한 생존 경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될지..  용수(龍樹) 보살로 불리는 인도의 철학자 나가르주나(Nagarjuna)는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했다. 우리의 외계인에 대한 생각이 결국은 공허한 몸짓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인류의 자아가 한 차원 더 성숙해져서 외계인이 있건 없건 간에 '계몽의 변증법'을 극복해 낼 수 있을지, 그 답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하든,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우리의 윤리적, 철학적 성숙함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주를 탐사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의 본질적 만남이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콘택트”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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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체 : 중국 원 소설은 3편을 통틀어 地球往事(지구왕사)라 칭하고 있으며, 1-3부에 각각 三体(삼체), 黑暗森林(흑암삼림), 死神永生(사신영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국내에서도 개봉했었고 중국영화 자국 내 역대 흥행 2위까지 올랐던 ‘유랑지구’의 원작 소설도 류츠신의 작품.  


* 삼체의 암울한 세계관 : 류츠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10여 년 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그의 이러한 '삼체' 소설 속 설정에 영향을 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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