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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그네 Nov 03. 2024

[역사속의오늘사건]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다

국내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힐 만큼 대규모 시위로 번진 광주 학생독립운동은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의 작은 다툼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게 사건이 이렇게 간단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그 원인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1919년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운동 뒤 일제는 반일적 사상 운동과 사회 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등 한국 민족의 대대적인 반격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쟁 경기로 비교적 호황을 보이던 일본 경제계에 공황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본 경제의 파국적 위기와 천황제 정치체제를 위협하는 좌파 세력의 진출은 일본 정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일본은 1927년 5월 제1차 산둥출병(第一次山東出兵)을 단행하여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상을 저지하면서 대륙 침략 정책을 여실히 드러냈다. 1928년 4월 일본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제2차 산둥출병을 강행하여 영국·미국과 대립하며 중국 침략에 앞장섰다.

또한, 6월에는 만주에서 특무공작을 전개하여 장쭤린(張作霖)을 폭살하였고, 7월에는 특별고등경찰(特別高等警察)을 전국에 배치하여 치안 체제를 강화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6·10만세 운동을 전후하여 한때 국내 사회 운동과 사상 운동 선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좌파에 대한 탄압이 확대됨으로써,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 세력은 새로운 방향에서 재편성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이 국내에도 적용, 실시되면서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려는 국내의 좌파 세력이 탄압을 받게 되자, 민족주의 진영은 새로운 방향에서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7월 15일 한국 민족의 단일 전선 기관을 표방하고 실업·종교·청년·형평·학생·사상의 각 계통을 망라하여, 대동단결에 의한 민족적 통합 세력을 구축할 것을 목적으로 명제세(明濟世) 등의 이름으로 조선민흥회준비위원회(朝鮮民興會準備委員會)가 결성되었다.


한편, 도쿄에 있던 한국인의 좌파 단체 북성회(北星會)는 1925년 1월 일월회(一月會)로 개칭하였다. 그후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김삼봉(金三奉) 등의 회원들도 귀국하여, 1926년 4월 14일 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화요회(火曜會) 등 4개 단체를 통합하여 정우회(正友會)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공산당사건으로 다시 많은 간부를 잃게 되고, 또 일본에 있어서의 무산정파들의 동향도 고려하여 그들 좌파와 민족주의가 상호제휴함으로써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하여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적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 민족단일전선 결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신간회가 발기한 YMCA 건물

그 결과 정우회는 1926년 11월 15일 해체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민흥회·전진회 등도 해체된 후, 거기에 소속된 회원들은 신간회의 기치 아래 수용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발기되어 회장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 홍명희(洪命熹)가 피선되었다.


같은 해 5월 16일 이에 승복하지 않은 좌파들은 속칭 874개 단체 대표들을 모아 조선 사회단체 중앙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었고, 5월 27일에는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항일 운동의 전개는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같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 체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는 일제 통치 기구에 협조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친일적 한국인을 위한 제한된 실무 교육인 간이 교육(簡易敎育)을 실시하였다.


또한, 한국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 일본 제국의 도덕적 기초가 무너지고 일본인 통치자를 무시하게 된다는 우려 속에서 식민지주의적 교육정책으로 일관하였다.


특히, 일제 당국은 3·1운동의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1면 1교계획(보통학교)을 4년내 달성할 것을 공포했으나, 10년 뒤인 1928년 현재 전국 2,400여 면에 공립·사립 보통학교가 도합 1,544개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식민지 교육 상황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83건의 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한국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체제 및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3·1운동의 좌절 뒤에 등장하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은 반일제, 독립의 길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방향에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열과 신지식열을 봉쇄하거나 해치는 교육정책은 한국 학생의 저항을 필수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1928년 4월경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항일 격문을 뿌린 사건에 연루된 이경채(李景采) 등 8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특히,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이경채가 『조선독립선언문』의 작성과 살포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1928년 6월 동맹휴교운동에 들어갔다.


또, 1928년 4월 28일에는 임실청년회관에서 제4회 전라북도 기자 정기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일제는 전라북도 기자 대회의 토의 사항과 강령이 불온하다 하여 기자 대표 6명을 경찰의 취조 뒤 송국(送局)하였다. 전라북도기자대회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 언론계뿐 아니라 호남 지방의 항일적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조인현(趙仁賢)이 3년 동안 이리·김제 등지에서 공작을 전개하며,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지점을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할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고 총기를 밀수입하는 등 구체적으로 준비를 진행시키던 중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은 국내에서 조직 공작을 통해 무력 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전라남북도 지방에 걸쳐 큰 자극을 주었다.


한편, 1928년 8월 5일 전라남도소년연맹 창립총회가 경찰에 의하여 금지되자, 전라남도 각 지방의 소년운동대표자들은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이들 대표자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그 뒤 가혹한 취조 끝에 정홍교(丁洪敎)·고장환(高長煥)·유혁(柳赫) 등 8명이 중앙에서 파견된 사실을 알아내고 이들을 광주지법 검사국으로 송국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8년대 전라남북도에서 일어난 이상의 민족적 결사 운동과 항쟁, 그리고 일제의 탄압은 광주학생계에 고무적인 충격과 용기를 심어 줬을 것이다.


광주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 결사 성진회(醒進會)는 항일·반식민지·민족독립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대국적 상황을 학생의 처지에서 집약한, 그리고 광주학생계의 현실에서 조직된 결사체로 1926년 11월 조직되었다.


다음해에 독서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고, 김기권(金基權)과 장재성(張載性)은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8년 11월 초 광주학생계의 이와 같은 항일적 분위기에 맞추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장매성(張梅性).박옥련(朴玉蓮).박계남(朴繼男) 등 11명이 주도하여,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소녀회는 동지를 포섭하여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학생계에서 일어난 항일 의식은 동맹휴교와 항일 운동이 고조되어 간 1927년과 1928년에 더욱 성숙해 갔다. 1927년 2월 5일 밤 소등 후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광주사범학교 학생 윤형남(尹亨南)을 일본인 체육 교사가 지나치게 모욕적인 언사로 단속을 가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광주사범학교 기숙사생 150명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라!",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같은 해 5월 하순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3학년생들이 '한·일학생교육제도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며 동맹휴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본격적인 항일동맹휴교운동은 1928년 6월의 이경채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이경채는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발생한 불온문서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되고,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당하였다. 이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이경채 권고 퇴학의 이유를 밝히라며 전교생이 동맹휴교에 돌입하였다. 이어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비슷한 요구 조건으로 동맹 휴교에 돌입하였다.


이렇듯 광주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확대되자,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졸업생까지 개입된 동맹휴교중앙본부가 발족되었다. 동맹휴교중앙본부가 설치되자 동맹휴교는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탈피하여 식민지 교육 체제와 통치 기구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하였다.


학생 동맹 휴교는 매우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동맹휴교 정신도 명백해져 식민지 노예 교육을 거부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1927년과 1928년 사이에 국내 항일 민족운동의 고조된 분위기와 맹렬한 호남의 항일 풍조 토대 위에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가 주축이 되어, 4개월간 전개된 동맹 휴교 투쟁은 학생계의 항일 의식을 명백하게 부각시켰으나 일제 당국의 폭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항일 기운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러던 1929년 3월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이 교규문란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교내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며 긴장이 계속되다가 광주학생동맹휴교 1주년이 되는 6월 26일 5학년을 비롯하여 2·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 이날 통학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중학생 하나가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라는 말이 문제가 되어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들의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 등으로 인해 광주지방의 한·일학생간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으며, 특히 광주주변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우리나라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관계는 긴박한 긴장감마저 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아는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 폭발하였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여 패싸움을 한 것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전개된 것이 11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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