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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 Jun 30. 2024

미국 회사에 한국인 인턴이 일하면 좋은 점

싱크탱크 인턴생활


네가 매번 찾아오는 기사 아이템에
 감탄할 때가 많은데,
그걸 포장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어학연수 4개월 + 8개월 인턴 프로그램으로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에서 인턴십을 시작했습니다.



첫 출근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입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양치를 하는데 칫솔이 안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억지로 입을 벌리니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통증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상태인 데다 너무 아픈 와중에 ’병원에 가면 병원비가 어느 정도 나오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입 안 벌어짐', '턱 통증' 등 닥치는 대로 각종 증상을 검색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으로 출국하기 수개월 전 사랑니를 발치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혹시나 발치한 자리에 염증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습니다. 정부 프로그램을 통해 가입한 보험이 적용되는 치과를 알아보았습니다.


$314가 청구되었던 치과 진료 영수증


진단을 정확히 못 알아들을까 봐 한인치과에 방문했습니다. 검사하는 기계가 한 바퀴 빙 돌아가고 의사 선생님 잠깐 뵙고 사랑니 뺀 자리에 생긴 염증이 맞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약은 애드빌(Advil) 진통제를 먹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걱정했던 병원비는 $314(약 376,800원)가 청구되었습니다. 그나마 절반은 출국 전 들었던 보험에서 보장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집주인과 치과에 다녀온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집주인도 사랑니가 있는데 아픈데도 병원을 안 가고 애드빌 먹으면서 버틴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미국은 매복 사랑니 뽑는 비용이 비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주인도 사랑니를 못 뽑는다니!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그리워졌습니다.






병원 진료를 잘 마치고 드디어 회사에 첫 출근했습니다. 첫날인데 환영식? 오티? 따위는 할 여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주한미대사 초청행사에 합류해 진행을 보조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퇴근해도 되는 건가?' 퇴근할 때쯤 정신이 들었습니다.



첫 주는 사실 기관 일정이 많아 눈치보기 바빴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서 일을 배우는 것은 마치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수영하는 법을 익히는 것 같았습니다. 어학원에서 들었던 영어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약어가 많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쏟아지는 영어 속에서 너무 당황하면 얼어버리는 저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연말이라 기관의 일이 많았지만 상사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인수인계,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시면서 업무에 필요한 자료들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기관에 들어와 보니 굵직굵직한 행사에 참여할 일도 많고 인턴이어도 단순업무만 시키지 않아 많이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커졌습니다.



인턴십은 약간의 보조금(Stipend)을 지급받긴 했지만 무급이었습니다. 그래도 교통카드가 지급되어 교통비를 해결할 수 있고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 부엌에 밥솥도 있고 먹을 게 많아 좋았습니다.






허겁지겁 업무에 적응하면서 부족한 모습도 많았습니다. 다른 인턴들에 비해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가 조금 느렸습니다. 일 1이 끝나면 일 2, 일 3, 일 4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 일을 처리하려면 아무래도 능숙한 작문 실력과 스피킹 실력이 필수였습니다. 아무래도 언어적인 부분이 미국인이나 해외생활을 오래 한 한국인 인턴들과 차이가 났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지?'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퇴근 후에도 업무 생각이 끊이지 않아 계속 매달렸지만 자료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기관에서 열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이해하느라 뇌에 과부하가 걸린 상황이었습니다. 한 인턴이 제게 커튼을 가리키며 'Layer' 해달라고 했습니다.


인턴 A(나) : "Eh?"
인턴 B : "Layer!"
인턴 A(나) : "Eh????"
인턴 B : "Layer!!!!! 겹치라고 이렇게!!!!"


답답했던 인턴은 안 쓰던 한국어까지 썼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또 얼어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급한 상황에 너무나 미안하기도 하고 간단한 영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인턴들과 비교도 되고 다른 인턴들은 대학원까지 재학하는 경우가 많아 비교적 리서치 업무 등에 익숙했습니다. 극강의 영어 사용 환경 속 언어적인 한계에 이어 배경 지식의 차이도 느껴졌습니다. '내가 회사에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씩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회사에서도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을 감안하고 뽑은 ‘인턴'이고 ‘무급‘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남은 인턴 생활을 잘 버텨보자며 스스로를 잘 다독였습니다.



첫 회사생활, 적응하는데 시간은 좀 걸렸습니다. 하지만 점차 일에 익숙해지면서 인턴생활에 조금씩 적응하였고 다른 인턴들의 도움으로 여러 의미 있는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인턴으로 일하면서 했던 일들을 정리하면 대략 6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매일 한국 관련 주요 기사 정리
2) 주 1회 뉴스레터 기사 아이템 찾고 기사 작성
3)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블로그 포스팅
4) DC 싱크탱크 이벤트, 컨퍼런스 참여 후 보고서 작성
5) 각종 리서치 보조 업무
6) 회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6자 회담, 콘퍼런스 등) 참여 및 준비


작성했던 기사의 일부


출근하자마자 매일의 주요 기사를 정리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 관련 기사 아이템을 찾아 영문 기사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일주일에는 전체 구성원 회의, 기사 작성 아이템 회의, 기타 업무 회의가 있었습니다. 회의를 준비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들었습니다. 단순 정보전달을 위한 목적의 기사가 아니라 특정 사건이 한국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등을 담은 종합적인 기사를 작성해야 해서 자료 수집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회의 시간에는 항상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준비한 내용을 발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추가 질문 및 토의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꼬리 질문에 대한 대답도 어느 정도는 준비했지만 머릿속에 한국말은 맴도는데 도저히 영어가 술술 튀어나오질 않았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정리해서 바로 보내드리겠다고 했지만 상사의 얼굴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때로는 준비한 내용과는 별개인 간단한(?) 질문들에도 답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마이크 테스트를 한다고 회의실에 모여 수다를 떨다 트럼프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트럼프의 경제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머릿속이 하얘지다 못해 퍼렇게 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인지라도 얘기를 해달라고 했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말을 시작해야 할지 순간 굳어버렸습니다. 너무나 고맙게도 옆에서 다른 인턴들이 자신의 생각들을 공유하며 대화를 이어나갔고 떠듬떠듬 열심히 대답하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하루는 회의 후에 다른 인턴들과 얘기를 하다 한 인턴이 아쉬워하는 말투로 ”네가 매번 찾아오는 기사 아이템에 감탄할 때가 많은데, 그걸 포장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라며 피드백을 해주었습니다.



고마운 조언 덕에 제 부족함을 깨닫고 어려움이 있으면 다른 인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잘 해내려고 하니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인턴들과 함께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래서 인턴이 여러 명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함께 일하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하면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언어가 다른 네이티브스피커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인인 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먼저, 한국에서 많이 보도되는데 미국에서는 이슈가 안된 소식이나 국내 트렌드를 더욱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 기사를 번역하거나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료들도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1930년대 자료를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자로 된 자료들도 열심히 번역해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일을 하면서 한국 정치를 전공한 경험을 살려 관련된 글을 쓰고, 리서치에 활용하는 등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제 강점을 찾아 나갔습니다. 심지어는 기관에서 진행하는 각종 이벤트에 한국인 내빈들이 오시는 경우 한국어로 응대할 수 있는 직원도 필요하곤 했습니다. 한국과 연관이 깊은 기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약간은 특별한 케이스였습니다.



또한 일을 하면서 영어뿐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로 질문도 많이 하고 소통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한국에서 일을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인턴 생활동안 더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기관에서 주관하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6자회담 이벤트


회사에서 ‘6자 회담 시뮬레이션’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미국 각지의 대학에서 회사를 방문하여 북한 비핵화 관련 모의 6자 회담을 했습니다. 비핵화에 대해 논의하며 합의점을 찾는 것은 한국어로 토의를 해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을 하는 것조차 너무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행사에 참여한 친구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해 준 덕에 자신감을 얻고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 대표로 한 번, 일본 대표로 한 번 참여했습니다.



6개국 대표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평화선언, 북한 인권, 비핵화 단계 등의 주제에 대해 각각 6개 국가가 모두 동의하는 합의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특정 합의점에 도달하게 되면 각국은 서로 다른 점수를 얻게 되는데, 어떤 국가에게는 유리하지만 어떤 국가에게는 불리한 결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합의를 이끄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회담 중에 북한 대표는 화가 난다며 회의장을 나갔습니다. 미국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국에 유리한 내용으로 협상하고자 했습니다. 이벤트를 직접 참여해 보니 왜 6자 회담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던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행사는 ‘코리안 아메리칸 데이’ 행사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귀빈들이 참석하신다고 하여 수개월 전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질문리스트를 만드는 등 모든 스태프들이 함께 준비하던 큰 행사였습니다. 소설 ‘파칭코’를 쓴 이민진 작가님 등이 오신다고 해서 다들 들떠있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고 서울시장님이 행사장에 오셨습니다. 시장님이 한 사람씩 악수를 청하자, 한국인 인턴들은 악수를 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미국인 인턴은 자리에 앉아서 한 손만 턱 내밀어 악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 인턴은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인 인턴들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신기한 눈으로 인턴을 쳐다봤습니다. ‘이게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싶었습니다.



신기한 문화차이를 뒤로하고, 정신없이 행사 진행을 보조하였습니다. 열심히 함께 준비한 이벤트를 성황리에 잘 마칠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국회의사당에서 진행된 컨퍼런스


기관에서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참 많았지만 다른 싱크탱크에서 하는 컨퍼런스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습니다. 꿈에 그리던 미국 인턴 생활의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인턴십을 하기 전에 궁금했던 게, 미국은 수평적인 기업문화라고 하는데 그게 어떤 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진짜 회사에서 일 때문에 이걸 어떻게 할까 스트레스를 받아도 상사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배울 점이 많은 분들 옆에서 일하며 회사 생활 전반에 대해서도 배워나갔습니다. 함께 일하시는 스태프들이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상사는 연구 방법론이 익숙하지 않은 인턴을 위해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 인턴은 누가 봐도 저였습니다. 상사는 오티를 마치고 저를 콕 집어 ”잘 적었지? 반영해서 바로 제출해“ 하셨습니다.



생일날에는 기관에서 파티를 열어주셔서 미국에서의 특별한 생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케이크를 쓱 건네주시고 적막이 이어져 ’이게 끝인가?‘ 싶었던 제가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 불러주세요!” 얘기를 꺼냈습니다.



생일파티를 마치고 나니 제가 처음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요청한 인턴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럼 그동안에는 그냥 케이크 받고 초 불고 끝이었단 말이야?‘ 순간 수평적인 회사가 맞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회의 시간에 발언 순서가 자유롭고 직급에 상관없이 언제든 찾아가 수다 떨 수 있는 수평적인 문화를 가진 직장임은 분명했습니다 :)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간단하게 밥을 해 먹고, 업무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거나 영어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어학원에 다니면서 헬스장에 다니던 습관을 유지하고자 홈트레이닝까지 하고 나면 녹초가 되어 잠들곤 했습니다.



침대에 눕자마자 팅! 튕겨서 출근하고 또 퇴근하면 공부하고 홈트하고 침대에 쓰러지고 팅! 일어나서 출근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이게 직장인의 삶이구나' 약간은 서글퍼졌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


그래도 주말에는 룸메이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돈을 아끼려다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을 골랐더니 혼자 다니기 싫어서 룸메이트들에게 같이 놀자고 졸랐습니다. 한국에서 돈이 없으면 ‘불편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데, 미국에서 돈이 없으면 '위험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룸메이트들은 다들 참 유쾌하고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지냈는데 박물관, 맛집 투어도 가고 명소들을 돌아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과테말라의 현대 정치사를 얘기해 주었는데, 평소 역사 얘기라면 눈꺼풀이 슬쩍 내려오는 제가 들어도 너무 흥미로운 역사를 가진 나라라 집중해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꽤 자주 집에 왔었던 집주인과 수다 떠는 일도 재미있었습니다. 집주인은 저와 같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데이터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치학 전공만으로는 취업하기 어렵다는 충고를 덧붙였습니다. 집에는 7개의 방이 있었는데 제 방뿐 아니라 어디엔가 문제가 생기면 오지라퍼 역할을 자처해 집주인과 소통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제가 나서는 일을 참 좋아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COVID-19?  Pandemic? CDC?


인턴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고, 이제 좀 워싱턴 D.C. 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 코로나 관련 뉴스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이어 바이러스가 미국에 상륙하면서 꿈같은 인턴 생활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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