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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 Jul 07. 2024

코로나 시기, 미국에서, 동양인으로 산다는 것

코로나가 바꾼 미국생활



"참가자들은 항공편이 확보되는 즉시 귀국하시기 바랍니다.”



미국 전역에 코로나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마트에 있는 물품을 너도나도 사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휴지뿐만 아니라 카트에 생필품을 가득 담아 비상상황을 대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코로나 확산 직후 마트의 손소독제 매대가 텅 빈 모습


처음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쓴 사람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인식이 있는 듯했습니다.



이후 락다운(Lock-down, 봉쇄령)이 시작되어 인파가 모이는 곳마다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동양인에 대한 차별도 심해졌습니다. 출근길에 어떤 흑인이 제 눈을 노려보다 제 발 앞에 침을 ‘퉤’ 뱉었습니다. 누가 봐도 저를 향한 공격에 화가 났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지 않아 겁이 나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같은 프로그램 참가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SNS에도 '동양인임을 이유로 채용이 취소되었다', '뉴욕에서 낯선 사람들이 둘러싸고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는 등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심지어는 무급인턴을 하고 있던 참가자들도 회사로부터 인턴십 종료 통보를 받아 비자 규정상 귀국해야 했습니다. 함께 지내던 룸메이트들도 귀국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저 또한 혹여나 회사로부터 인턴십 종료 통보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회사로부터 모든 인턴들은 재택근무를 하게 될 예정이니 관련 시스템을 정비하라는 업무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부기관에서 인턴십 참가자들에게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교육부 및 국립국제교육원은 미국 코로나 상황의 심각성, 인턴활동 사실상 곤란, 감염 시 의료시설 접근 제한 등 고려, 여러분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여 프로그램 전면 중단 및 참가자 전원 귀국조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외적으로 현지 체류가 가능한 경우는 안전 확보에 관한 소명이 가능하고, 현지 주재원, 중개기관(스폰서)의 확인이 있는 경우만 해당됩니다.

참가자들은 항공편이 확보되는 즉시 귀국하시기 바랍니다.


전례 없는 상황 속 정부기관의 결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인턴십을 종료하고 귀국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움이 컸습니다. 회사 측에서 재택근무로 전환하도록 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집 보증금 문제도 있었습니다. 인턴십 기간을 학점으로 인정받아 졸업하려던 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기관에서는 추가 안내를 통해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참가자는 미귀국 사유서를 제출하고 미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부의 귀국 요청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지 않겠다는 사유서까지 썼으니, 코로나에 걸리면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재택근무로 전환되면서 사실 처음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업무 진행에 혼란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회사는 급변하는 상황에 너무나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재택근무, 화상 회의, 화상 세미나를 위한 시스템이 다 갖춰져 있었지만 코로나가 이를 한참 앞당기면서 순식간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연결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같이 일하던 인턴이 한국에 돌아가 회사 일을 하는 것을 보고, ‘큰돈 들여 미국까지 왔는데 이제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지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저 또한 굳이 월세가 비싼 워싱턴 D.C. 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기관에서 진행하던 오프라인 행사도 전부 온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온라인으로 세미나를 하게 되니 워싱턴 D.C. 에 살지 않는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어 확장성 측면에서는 온라인 운영이 유리했습니다.



직접 가지 않고도 한국 국내정치, 한미 에너지 협력, 북한의 정치 경제 트렌드, 한일관계 등을 주제로 한 많은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기관들은 어떻게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는지, SNS 홍보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찾아보면서 회의 시간에 더욱 적극적인 SNS 활용을 건의하였습니다. 회의 때도 상의는 셔츠, 하의는 잠옷을 입고 회의에 참석하는 게 편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오히려 기관에는 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발 빠른 코로나 대응, 드라이브 스루 검사 시스템,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선거를 치르는 모습 등이 주목을 받으면서 인터뷰 및 자료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한국의 영화, 게임 산업, K-POP 등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코로나 상황에서 치르는 한국의 선거와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 관련 글을 기고해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협조적인 국민성 등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 외에도 각종 리서치에 필요한 통계자료를 업데이트하고 자료를 번역하는 등 일복이 터져 온종일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단점이라고 할만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집이 회사고 회사가 집인 것 같은, 일이 끝나도 끝난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일을 하니 일을 한 티가 잘 안나는 것 같았습니다. 예를 들면 데이터를 찾다가 못 찾으면 일을 안 한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 업무성과를 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한 스태프 분이 출산을 앞두고 회사에서 축하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오프라인에서 모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CEO께서 가수를 섭외하셔서 ZOOM으로 공연을 보는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모여서 축하할 수 있어 좋았지만 ZOOM 캡처사진이 단체사진이 되어 아쉬웠습니다.






재택근무로 더 많은 리서치, 글쓰기 업무를 하게 되면서 내심 영작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던(!) 상사께서 어느 날 연락이 왔습니다.



“이거 쓰는데 시간 얼마나 걸렸어?”
“1시간이요. ”
“10분을 줘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 네가 뭐가 문제인지 리포트로 제출해. “



허겁지겁 상사에게 리포트인지 반성문인지 분간이 안 되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이후 매일 미국 주요 언론의 기사를 요약해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요약을 하고 나면 피드백을 매일 주셨고, 일만 하시기에도 바쁠 텐데 제 요약을 오류가 없을 때까지 계속 첨삭해 주셨습니다. 최대 하루에 10번을 해주신 적도 있습니다. 저도 번거로움을 드리지 않도록 실수를 줄이고자 했고 나중에는 추가 수정 없이 통과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다른 인턴들과 기자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어휘나 표현 방식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업무 외 시간에는 유튜브를 보면서 표현을 익히고, 카톡에서 나누는 한국어 대화들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부족한 실력을 보완하고자 했습니다.



코로나 상황 속 자유로운 외출도 어려워지고 집에만 있는 일상이 계속되면서 가끔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국에까지 와서! 유튜브로! 그토록 가고 싶었던 그랜드 캐니언 영상을 보는데 정말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



업무 중 부담되는 상황이 있을 때나 기분이 울적할 땐 요리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한국 음식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김밥도 싸 먹고 전도 부쳐 먹고 가끔은 갈비찜도 해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오기 전 그룹홈협의회에서 펀딩을 도와주셨는데 감사한 마음에 제 전반적 생활이나 고민들을 월마다 메일로 보냈습니다. 매달의 생활을 글로 정리하면서 생활을 반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인턴십을 하며 업무 태도나 작문 실력에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미국 사회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너무 많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두 가지가 있다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와 , 바이오루미네센스(Bioluminescence, 생물발광)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위 이후 은행이 불에 탄 사진(직접 찍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는 당시 경찰관에게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흑인 플로이드가 사망하면서 촉발된 시위였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경찰파워는 어마무시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때로는 이런 과잉진압 논란이 제기되는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진압 영상이 SNS를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시민들의 거센 항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시위가 격화되어 시위대는 가게 창문을 부수고, 물건들을 약탈하고, 은행 등의 건물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져 한동안 상황을 예의주시했습니다.



한국에서 보던 시위와는 또 다른 방식이라 놀랐고 약탈하는 모습의 보도들을 보며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국에 잠시나마 살고 있는 ‘비주류’ 동양인으로서 참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시기 바이러스만큼이나 미국 사회에 넓게 퍼졌던 아시안 혐오와 이들을 향한 증오범죄(Hate Crime)들을 보며 참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이오루미네센스(출처: 픽사베이)


코로나로 락다운(Lock-down, 봉쇄령)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의 해변 출입이 통제된 사이 바다가 푸른빛으로 변했다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유기생물들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바이오루미네센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짝거리는 플랑크톤들이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휴가를 즐기러 온 듯했습니다. 파도가 칠 때마다 푸른빛이 찬란하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해변 근처는 출입이 통제되어 멀찍이서 빛나는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인턴십이 종료되는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면서, 아쉬운 마음에 더 빨빨거리며 밤바다를 보러 다녔습니다.






드디어 8개월가량의 인턴 생활이 끝났습니다. 일을 하면서는 업무에 대한 부담이 크기도 했는데, 막상 인턴십이 끝나니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것, 자신감 있게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 그에 맞는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인턴십을 마치면서 모든 스태프에게 단체 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제 인턴십 마지막 날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제가 더욱 나은 직원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턴십을 돌아보니 워싱턴 D.C. 에서 열리는 30개 이상의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20개의 기사를 썼으며, 기관에 3개의 한국 관련 글을 기고했습니다.  

많은 리서치를 도울 수 있었던 것 또한 영광이었습니다.(중략)

솔직히 말씀드리면, 인턴십을 하기 전 영어 말하기와 글 쓰는 것이 걱정도 되었습니다. 가끔은 주눅이 들 때도 있었지만 많은 스태프들과 인턴들이 더 나은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업무 중 받았던 피드백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일하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고, 여기서의 경험은 향후 제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정부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미국에 올 형편이 안되었던 제겐 항상 꿈같은 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지만 저는 나중에 생겨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할 때마다 이 인턴십 경험을 회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을 담아,
OOO


CEO였던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 전 주한미대사의 답장을 받아 기뻤습니다.



Dear OO,
친애하는 OO 씨,

I am very touched by your letter,
and glad to know that you found your
intern experience a useful and valuable one. It is because you brought much effort and sincerity to it.
당신의 편지에 감동받았습니다. 당신이 인턴 경험을 유익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느끼셨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는 당신이 그 경험에 많은 노력과 진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This will serve you well in the future.
이는 앞으로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I wish you all the best,
Kathleen Stephens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하며,
캐슬린 스티븐스


미국 생활을 돌이켜보니 집을 잘 구할 수 있는지, 인턴십 배치가 언제 되는지, 인턴십은 유급인지 무급인지, 어떠한 회사를 만나는지, 경제적 상황이 어떠한지, 질병, 기타 등 짧은 기간 동안 참 많은 변수가 있었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계속해서 구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되었고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도 불명확한 상태였습니다. 귀국을 결정하면서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인생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미국 생활을 마쳤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중국인 같고,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누가 봐도 한국인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 직원이 제게 중국어로 막 말을 걸다가 제가 못 알아듣자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중얼중얼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직원이 다시 돌아와 "중국인인 줄 알고 중국어로 얘기했다" 며 정중하게 영어로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도 중국인들이 중국어로 사진 좀 찍어달라고 했는데, 제가 사진을 찍다가 ‘저 한국인이에요’ 하니 놀라면서 중국인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단기연수 프로그램으로 중국에 잠깐 다녀왔을 때도 사람들이 저한테 길을 물어봤는데 잘 모른다고 한국인이라고 하니 놀란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누가 봐도 한국인이라는데, 약간의 국적 논란이 있는 외모를 가졌지만 드디어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해 2주 동안 자가격리 기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어딜 가서 뭘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루하루 불안하고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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