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 그리고 구직
참고 : 본문의 원화는 당시 1달러 = 약 1,200원이었던 환율로 계산 후 표기하였습니다.
“주디가 영어가 제일 많이 늘은 것 같아.”
어학연수 4개월 + 8개월 인턴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와 어학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어학원에서 첫날 기념으로 피자를 시켜주셨습니다. 싱거운 입맛인 저는 '으악! 좀 짠데?' 느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잘 먹는 것 같아 한 입 더 먹었습니다. '….....' 안 되겠다 싶어 버리기로 했습니다.
정리를 하려는데 큰 통에 모든 쓰레기를 한 번에 버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줄 몰랐습니다. 같이 간 참가자분들과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분리수거했는데 한국보다 큰 캘리포니아에서 분리수거를 이렇게 하다니 허무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고 레벨테스트를 통해 반을 배정받았습니다. 어학원에서 쓸 영어 이름을 고민하다 비키라는 이름을 추천받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주토피아 캐릭터의 주디를 닮았다면서 주디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엔 주디로 개명했습니다.
어학원 선생님은 정말 활발하고 말이 빠른 분이셨습니다. 걱정이 되었지만 선생님은 일부러 말하는 속도를 느리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어학원에서는 기초 문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너무 쉬웠지만 막상 회화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4개월 후면 일도 해야 하는데, 최선을 다해 수업을 듣고 숙제도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어학원 선생님은 발음에 특히 신경 써 주셨고, 매주 에세이 숙제를 통해 영작과 교정을 반복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다른 친구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얘기하다 막히는 부분을 적어두고 따로 찾아보았습니다. 대화를 할 때 너무 떨리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어색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하루하루 어학원을 다니다 보니 인지하지 못했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자비부담으로 어학원을 다니려면 꽤나 비용이 비쌌습니다. 새삼 정부 지원을 받아 어학연수를 하게 된 사실이 참 감사했습니다. 이 정도 실력에 열심히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성실히 수업을 수강하였습니다.
그래도 수업이 끝나면 외국인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코믹콘 같은 축제도 가고, 해변 이곳저곳을 놀러 가기도 했습니다. 화요일에는 타코를 할인하는 타코 튜스데이(Taco Tuesday)가 있어서 가끔 같이 타코를 먹으러 간 것도 좋았습니다. 어학원에 탁구대가 있어 친구들과 함께 탁구를 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학원 생활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평화롭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상황에 911을 부르고야 말았습니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2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그날은 곧장 집으로 향했는데, 펫코 파크에서 야구 경기가 있어 어학원에서 좀 떨어진 환승센터(Transit center)로 가서 룸메언니와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 양말을 신지 않은 추레한 행색의 남자가 함께 탔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타는 듯했습니다. 양말도 안 신고 걸음걸이도 그렇고 약간 특이한 사람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저와 룸메언니는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제 근처에 앉더니 힐끔힐끔 쳐다보았습니다.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고 숙제를 하는 척 책으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계속해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옆에서 룸메언니는 자고 있어 깨우기도 그렇고,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아이 둘과 어머니가 버스에 탔고 그들에게도 가까이 다가가며 위협적인 제스처를 보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리자, 다시 제 옆으로 남자가 자리를 옮기면서 반동을 이용해 얼굴을 엄청 가까이 내밀었습니다. 정말 식겁했지만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가는 40여분 동안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정류장에 내릴 때가 되어 언니를 깨우고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설마 따라 내리진 않겠지?' 생각했는데, 불안한 예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저와 언니는 너무 놀라서 가던 길과 반대 편으로 가고 있는데도 남자는 계속해서 따라왔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중요부위를 움켜쥐고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에 마침 근처에 전기 설비 관련 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급하게 그분들께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남자는 가라는 얘기에도 계속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결국 룸메언니가 911에 연락했습니다. 911을 부르자 남자는 급하게 도망갔고 경찰관분들이 집에 데려다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긴장이 풀리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왔습니다.
미국 길거리에서 종종 차가 부서져도 테이프를 붙여서 타는 걸 보고 참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대중교통에서 이상한 사람을 마주치고 나서는 한동안 '아무렴 청테이프를 붙여서라도 차를 타야지' 생각했습니다.
이후에도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이 저를 확 밀치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웬 이상한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쫓아오기도 하는 등 겁나는 상황이 가끔 있었습니다. 모두 낮 시간에, 사람이 많은 대로변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어학원 생활 초기에 치안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니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긴 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 참가자분들에게 911 부른 이야기를 하다가 사는 지역, 월세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300(약 36만 원)로 참가자 중 가장 저렴했지만,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일주일에 $290(약 348,000원)을 내기도 하고 미국의 월세는 정말 천차만별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위치와 치안을 생각하니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돈이 없으면 ‘불편한’ 환경에서 살게 되고, 미국에서 돈이 없으면 '위험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어학연수하며 치안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고, 어학연수를 하면서 제 삶에 긍정적인 변화들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총 세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요리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은 장 보는 물가가 워낙 저렴하고 외식할 때 사 먹는 음식들이 자극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아 요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흥미가 생겨 미국에서 생활하는 내내 다양한 요리를 시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간장에 물을 타야 하는데 간장을 왕창 부어 불고기 간장 절임을 만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어떤 건 생으로 먹는 게 더 맛있을 정도로 맛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시도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요리는 참 좋은 취미인 것 같았습니다. 실패해도 부담이 적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맛이 없었을까’ 잠깐 고민해 보고 다시 부담 없이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요리가 하루하루 늘어갔습니다.
두 번째로는 미국에서 헬스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정말 헬스를 하려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4개월 동안 이용권을 끊고 헬스를 꾸준히 다녔습니다.
주위에서 그리고 헬스장 이용하시는 분들도 제 자세가 영 아니었는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사실 무리하게 운동을 하지 않아 더욱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꾸준히 헬스장을 다닌 것 자체만으로도 큰 뿌듯함을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영어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4개월의 어학연수 중 2개월이 넘어가면서 부족한 영어실력도 갈수록 스트레스였습니다. 2개월 만에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히 크나 큰 욕심이지만 영어 잘하는 분들과 비교도 되고 인턴십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비교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자면, 의식적으로 안 하려고 했지만 미국에 가니 돈 많고 여유 있어 보이는 친구들이 한국의 대학 캠퍼스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아 보였습니다. 함께 자주 어울리고 싶었지만 몇 번만 같이 놀아도 꽤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을 보며 아주 가끔은 부러웠습니다. 친구들과 쇼핑을 하러 가면 다들 "너는 아무것도 안 사?" 하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맘에 드는 게 없다"라며 까다로운 척했습니다.
어느 날은 한 성격 좋은 친구와 쇼핑을 갔는데 둘이 동시에 같은 패딩을 집었습니다. 가격이 대략 30만 원 정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쏜살같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는데, 친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사는 걸 보았습니다. 순간 부러웠지만 부러워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엔 그저 어학연수 기간에 할 수 있는 회화 실력을 쌓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다행히 고마운 한국인 참가자 오빠가 있었습니다. 서로 친해지면서 얘기해 보니 생각도 환경도 참 비슷했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매일 영어를 할 수 있는 환경에 왔는데, 좀처럼 오르지 않는 실력에 대한 고민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헬스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배운 걸 써먹어 보겠다며 영어로 대화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어학연수가 끝날 때 즈음 주위에서 다른 참가자분들이 “주디가 영어가 제일 많이 늘은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해주어 참 고마웠습니다.
4개월이 참 빨리도 지나갔습니다. 어학연수가 끝나는 날이 다가오면서 주위 참가자분들은 인턴십을 하게 될 곳이 확정되어 이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출국 전, 회사 리스트를 주고 5지망까지 적어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적어냈던 5곳은 구인하고 있지 않은 곳들이었습니다. 부족한 경력을 가지고, 국내에서도 힘든 취업을 미국에서 도전하는 상황이라 하루하루 불안했습니다. 일단 어학연수 하면서 작문했던 것들, 특히 취업을 대비하여 북한 비핵화 이슈나 한국 정치 관련해서 글을 썼던 것들을 보완해서 구직에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워싱턴 D.C. 에 있는 국제관계 관련 싱크탱크(Think Tank)에서 인턴십 오퍼를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어느 회사에서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특히 워싱턴 D.C. 에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제게도 면접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다행히 면접은 잘 본 것 같았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면서 수강했던 정치외교학 전공과목들의 성적이 좋았고, 기관에서도 한국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합격 연락을 받고 드디어 일할 곳을 찾아 동부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워싱턴 D.C.로 가게 되며 또 다른 집을 구해야 했는데, 저와 비슷한 지역에서 인턴십을 할 예정인 참가자 분을 알게 되어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워싱턴 D.C. 의 살인적인 집값을 감안하면 여기서도 룸메이트와 한 침대를 써야 했습니다. 치안이 매우 좋지 않은 지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딱 침대 한 개와 캐리어 가방 정도 들어갈 크기의 방이 월 $900(약 108만 원)였습니다. 룸메와 월세를 반씩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대도시 치고는 저렴한 편이었고, 몸 가눌 곳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샌디에이고에서 7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 D.C. 에 도착했습니다. 동부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인턴십을 시작하려는데, 가자마자 병원 신고식을 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