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게 비치는 흰 천이 무대 사방을 한 바퀴 두르고 있다. 바깥에서는 베일 너머로 정적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분주한 관객들과 분장한 배우들, 전면과 후면, 무대와 객석, 그리고 공연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다. 은근하게 비추는 푸른 조명을 응시하다 보면 어느새 환상에 빠질 준비를 끝마친다. 시작을 알리며 걷어진 막이 다시 휘감기는 순간은 크리스티앙이 시라노의 입을 빌려 록산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유일하다. 그날 밤 발코니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형태로 사랑을 속삭이지 못했다. 크리스티앙이 내세운 것은 시라노의 문장이었고, 시라노가 용기를 낸 까닭은 크리스티앙의 외모 덕이었으며 록산이 반한 상대는 지성인의 가면을 빌려 쓴 멍청이였기 때문이다.
⒞ 극단여행자 윤헌태
사랑에 빠진 세 사람 모두 솔직하지 않다. 시라노는 얼굴을, 크리스티앙은 영혼을, 록산은 눈을 가린 채 거대한 연극을 펼치고 있다. 고결한 정신과 위대한 긍지마저 좀먹는 거인의 이름은 바로 ‘콤플렉스’. 그것은 아마 여전히 각자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괴물일 것이다. 보름달 앞에서 그림자로 엿보이는 시라노의 모습은 남들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남들과 같을 필요가 없었다. 담백한 문장가로서나 용맹한 근위대장으로서나 커다란 코는 하등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랑스러운, 사실은 빌어먹을 열등감.
⒞ 극단여행자 윤헌태
누구나 콤플렉스의 신기루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를 느낀다. 17세기 프랑스에 있어야 할 배우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퍼포먼스는 오늘날 우리 곁을 돌아보게 한다. 주체성을 노래하는 연예인을 선망한 나머지 그대로 따라 하는 아이러니, 개성을 바라면서도 무난하길 바라는 아이러니, 과시하기 위해서 텅 비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난무한다. 갓생 챌린지, 추구미, 양산형 패션, 그리고 경쟁형 입시 제도 따위와 함께.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고 평가하며 자책의 늪에 빠져버린다. 시라노, 록산, 크리스티앙, 드 기슈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존 인물에 기반하여 젠더-프리하지 않은 배역을 오직 여성 배우들로 채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는 사랑을 고전으로 다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 이 희곡을 더 이상 고전적인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랑과 비극, 반성과 용서만 읽어낼 것이 아니라 진실한 나를 감추어버리는 장막을 걷어낼 시간이라는 의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이상을 좇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또 한 번의 아이러니. 자신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체성을 찾는 여정을 떠날 수 있다. 사랑 앞에서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들, 굽히지 않는 당당한 자세로 거인들과 맞서 싸우려는 이들, 무엇보다도 자기 안의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이들이 모두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