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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달 Oct 12. 2024

엄마 | 스물여덟의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우리가 어쩌면 이 생에서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네 아빠랑 살고 싶어서 산 거 아니야. 처음에는 네 아빠랑 결혼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임신이 됐어. 그냥 결혼 안 하고 도망가려고 하다가 네가 배 속에 있어서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결혼한 거야.”



언젠가 엄마가 내게 한 두어 번쯤 꺼낸 얘기다. 엄마아빠가 나를 임신해서 급하게 결혼했다는 것은 한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다.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과 내가 태어난 사진에 찍힌 날짜가 불과 몇 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별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처음으로 들었던 엄마의 그 이야기를, 나는 어쩐지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쉽사리 잊지 못한다.


내게 일부러 상처를 입히고자 악의적으로 한 이야기는 아님을 지금은 안다. 어쩌면 “너를 낳으려고, 너를 만나려고 결혼하게 된 거야.”하는 좋은(?) 쪽의 의도로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애써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게 비록 정신승리일지라도.)


그렇지만 가끔씩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자기혐오와 우울이 나를 덮칠 때에는, 지난날 엄마가 내게 한 이야기들이 수많은 압정이 되어 온몸에 콕콕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에면, 나는 어쩌면 내가 태어난 것부터 잘못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어?


언젠가 극심한 우울감에 짓눌려 정신과에서 처방 받은 한 달 치의 약을 전부 털어 먹은 뒤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하고 돌아온 날, 나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왜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 이야기를 의식 저 너머에서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병원 응급실에서 누워 있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와 밤새 자리를 지켰던 엄마는, 집에 돌아와 꺼낸 내 질문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는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니? 가만히 보면 너는 그게 문제야. 우리(부모)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사실 그 대답 이후에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틀을 병원에서 지내고 돌아와 몹시 피곤했기도 했고, 아직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약기운 때문인지 뭔지, 아무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다시는 그 이야기에 관해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엄마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내가 미워서 하는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는 성인이 된 지 한참인 자식들에게, 카톡으로도 전화로도 매일매일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할 때의 엄마는 억울했을지도, 허탈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왔던 엄마는 늘 희생해 왔고, 식구들 그 누구도 그 희생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명절 때면 혼자 차례 음식을 만들어야 했고, 그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면서도 늘 할머니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다. 그 모진 소리는 내게도 들렸고, 나는 할머니의 그 모난 잔소리와 함께, 들리지 않는 엄마의 울음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차례를 다 지내고 나서도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했다. 각자의 시댁에서 차례를 마치고 오는 고모들의 저녁밥을 지어줘야 한다는 게 할머니의 이유였고, 아빠의 고집이었다. 언젠가 아빠는 술에 취한 채로, 엄마가 친정에 갈 거면 차 타고 가는 길에 우리 다 같이 죽자는 뜬금없는 협박을 내밀었다. (나와 동생은 옆에서 그 협박을 같이 듣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무렵에 엄마가 폭발했다. 울분과 서러움에 아빠에게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고함을 지르고 가슴을 탕탕 치는 엄마의 모습은, 십수 년이 지난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위협했다. 나는 냅다 달려가 엄마를 안으면서, 아빠를 향해 ‘엄마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핸드폰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에게는 좋은 배우자는 아니었어도 내게는 거의 대부분의 날에 좋은 아빠였던 사람은, 정말로 본인을 경찰에 신고하려는 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고, 나중에서야 엄마가 귀띔해 주었다.




엄마는 꿈이 많았다. 이십 대의 엄마는 미용과 요리도 배웠고 공부도 했었고, 하고 싶은 게 많았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를 임신하고 아빠와 결혼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했다. 엄마는 또 나를 임신하고 나서, 고향을 포기해야 했다. 가족도 친구도 뭣도 없는 낯설고 먼 곳에 와서 가정을 꾸리고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으며, 서른이 훌쩍 넘은 남편의 동생을 몇 년 내내 신혼집에 재우며 돌봐야 했다.


나는 엄마의 삶을 대가로 살고 있다. 엄마가 결혼하지 않고 나를 낳지 않는 선택을 했을 때 누릴 수 있었을 모든 기회비용을 다 써서 내가 태어났다. 그런 생각은 깊고 깊어져, 어떨 때에는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스스로가 엄마의 인생을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인 것만 같은 죄책감을 지울 수 없기도 했다.


언젠가 심리 상담 센터에서 상담하면서 자존감과 함께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상담사는 내 생각이 왜곡된 생각이라고 했다. 어찌 되었든 성인인 두 사람이 결정한 일이고, 그 선택의 책임은 온전히 두 사람의 몫이지 이제 막 태어났을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다. 머리로는 십분 알고 있지만, 그 왜곡된 죄책감과 자기혐오는 지난날의 엄마의 희생을 잊지 말라는 듯이 꽤 자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엄마가 내게 한 이야기들을 듣고도 상처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한 엄마가 밉지 않은 것도, 원망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엄마가 가엽다.

딸은 평생 엄마를 짝사랑한다고 했던가.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엄마가 하고 싶었던 대로 해.



이제는 나보다 더 어린, 스물여덟의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지 그뿐이다.


엄마가 도망가고 싶었다면, 그냥 도망가.

아빠에게서, 나에게서.

나를 지우고, 아빠를 지우고,

지우고 남은 공간에 엄마가 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것들, 엄마의 꿈들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어.

그냥 그렇게… 우리가 어쩌면 이 생에서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엄마는 그저 엄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자유롭고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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