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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달 Oct 17. 2024

가방 | 내 가방에 담긴 것들은

아주 조금만 지칠게요

조금 오래전에 타지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던 나는, 제법 오래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에게 새로운 병원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다니던 그 병원은, 동네에 이름 좀 있다는 정신건강학과 병원들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그 악명 높은 초진 예약을 기다리면서), 겨우겨우 찾은 n번째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내게 ‘ㅇㅇ씨가 팔십 먹은 할머니였다면 지친다는 말에 납득이 가겠지만, 지금 ㅇㅇ씨 나이의 사람이 그런 그런 말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아직 팔십의 절반조차도 먹지 않은 나이였기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칠 정도로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래놓고 문득 든 의문에 진료실 밖에서 조용히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제 살아온 지 이십 년, 삼십 년 남짓한 시간을 살아온, 팔십 먹은 노인의 절반의 시간도 채 보내지 못한 사람은 좀 지치면 안 되는 걸까?


청년들이 지칠 기회조차 없었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청년 자살률은 그렇게까지 참혹한 순위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내 가방에는 노트북과 갤럭시탭과 공책, 필통, 충전기, 읽을 책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단순한 노트북도 아니고, 단순한 갤럭시탭도 아니고, 단순한 공책과 필통도 아니다.


가방 속의, 돌보다도 더 무겁고 둔탁한 나의 노트북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무겁고 둔탁한 내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증명사진과 이력서가 저장되어 있으며, 내가 당신 회사에서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담겨 있고, 각종 사람인과 잡플래닛 같은 사이트들에 로그인되어 있어서, 그것들은 수시로 ‘너 이제 어지간하면 한 군데 정도 들어가서 일 인분의 밥값을 할 때가 되었다’고 알림을 속삭이곤 한다.


내가 다시 취업하기 전에 다 공부할 수 있을까 싶은 수많은 문서 PDF 파일들과 북마크 페이지, 자격증 기출문제 등은, 어느새 나의 갤럭시탭에 차곡차곡 쌓여 있으며, 공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와중에도 인문학적인 소양은 취업 준비생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하여, 내 가방에는 늘 읽을 책 한 권이 들어 있다.


이제 제법 날씨가 서늘해졌음에도 등에 가방을 메고 걷고 있으면 등 뒤로 땀이 배이는데, 어쩐지 내가 짊어지고 있는 가방 안의 내 짐들이 너무 지쳐서 흩뿌리는 눈물 같기도 하다. 그것들은 내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지친 비명을 내지르며 덜컹거리기도 한다.


무작정 지치지 말자고는 못하겠다.

가만히 있어도 지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다만, 당신이 언제든 지칠 수 있음을, 혹은 지금 어쩌면 당신이 지쳐 있음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각자의 가방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을 것임을, 나를 통해, 당신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조금만 함께 더 걸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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