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쓴 것처럼, 2차 시험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작년과 똑같이 10점 차이로 탈락했다는 사실, 심지어 과목 하나는 더블 스코어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계속 이 시험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맞는지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말로만 듣던 ‘고시낭인’이 될까 봐 겁이 났다. 상상했다. 수년째 고시를 준비하다가 나이만 먹은, 단칸방에서 츄리닝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그는 그만두지도, 공부하지도 못한 채 폐인처럼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남들은 버젓이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30대 중후반이 되어서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이대로면, 그게 진짜 내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냥 고시를 그만두고, 공기업으로 방향을 틀 생각도 했다. 실제로 고시생들은, 정 합격이 막힌다면 출구전략으로 공기업을 준비하고는 한다. 필요한 자격증과 공기업 내부 필기시험은 고시와 비슷한 과목을 보기 때문이다.
그즈음 나는 컴활 1급, 기계기사와 같은 자격증을 공부하여 취득하였다. 이 자격증들은 고시 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만, 공기업 지원 시 가산점을 준다. 고시와 관련 없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한 달 이상의 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나 또한 ‘탈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준비만 한 게 아니었다. 공기업 채용 공고를 보고는 실제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나는 아직 ‘취업적령기’였다. 비록 고시 공부를 했지만, 학기를 병행해서인지 나이가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방향을 틀면 늦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은 자격증 없이 합격 근처까지 간 적도 있었고, 이는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주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공기업에 점점 더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공기업을 준비하며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어느 날 문득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정말 공기업을 가도 괜찮겠냐고. 아니었다. 이대로 고시를 포기하면, 남은 인생을 살며 내내 후회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반대로 상상해 보았다. 어느 한 공기업에서 일을 하며, ‘그때 더 해볼 걸 그랬다’라고 후회하는 30대 중후반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결심했다. 한 번만 더 해보자. 정말 혼을 갈아 넣어보자.
기맥정에서 짐을 빼고, 본가 근처 스터디카페로 이동하였다. 코로나 때문에 기맥정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미숫가루를 먹었다. 스터디카페 주방으로 가서, 준비해 둔 텀블러에 미숫가루와 우유를 넣고 흔들어 한 입에 마셨다. 설거지까지 해서 대략 15분이 소요되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공부하러 돌아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고쳐야 했다. 스터디카페에 같이 다닌 친구와 내기를 했다. 9시까지 출석체크하고, 늦으면 밥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땀을 흘리며 뛰어오고는 했다.
쉬는 시간은 커피 사러 가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이렇게 딱 두 가지였다. 그 외의 휴식은 없었다. 휴대폰도 항상 집에 두고 다녔고, 밤에 귀가한 뒤 그날 밀린 카톡을 처리했다.
여전히 공부는 쉽지 않았다. 1차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다. 1차 시험은 과목당 90분인데, 시간이 매우 부족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시험시간 동안 단 1분 1초도 헛으로 쓰지 못하고 문제를 푸는데 모든 정신을 쏟아야만 한다. 하루에 세 과목을 치르니, 그 일을 세 번 해야 한다.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한 번은 1차 시험 모의고사 문제지를 펼쳐놓고는, 너무나 풀기 싫어서 도망쳐 나온 적이 있다. 도저히 90분간 사투를 벌일 자신이 없어서였다. 밖에 공원에 가서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시험지는 말끔하게 그 자리 그대로 얹어져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도망갈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였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시험지를 펼쳤다. 그리고 90분간 집중하였고, 문제를 풀어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두 번 연속 10점 차이로 떨어지며 성장이 정체된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공기업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기까지 한 선택지였다. 나의 청춘과 미래를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더 하고 싶었다. 청운의 꿈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나의 청춘과 미래를 걸고, 아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기꺼이 도박을 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