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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2차 시험

by 이월생

1차 시험은 잘 봤다. 가채점 결과, 상당히 높은 점수가 나온 것이다. 덕분에 1차 합격을 확신하였고, 나는 그다음 날부터 바로 2차 공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1차에서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동보트를 탄 채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항해하는 느낌이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때까지는.


기억


늦잠은 계속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서 기맥정으로 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이러다가 인생 망하겠다는 자책감이 눈뜰 때마다 찾아왔지만,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핑계스럽지만, 코로나 때문에 수험생활 패턴이 꼬인 것도 한 몫했다.


2020년이 밝은 후, 8월 2차 시험을 치르기까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 시기 내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여, 글을 쓰며 휴대폰 캘린더를 열어보았다. 당시의 내가 써놓은 일정들이 빼곡했다. 내가 겪었던 슬럼프, 유튜브 촬영을 위한 캠 구입, 학교 졸업을 위한 학사 논문 작성과 발표 준비.. 기억을 복기해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이 기간은 전 수험기간 중 가장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시기이다. 어쩌면 묵묵히 공부만을 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쎄, 뭔가 부족했던 것 같다. 오히려 덜 열심히, 더 적게 공부했던 느낌이다. 전년도와는 달리, 필사적인 의지로 스퍼트를 달렸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재상경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2차 시험은 서울(한양대학교)에서 치르게 되었다. 작년에는 시험 바로 전날 숙소에 올라갔으나, 이번에는 시험 전전날 올라갔다. 비록 숙소비는 더 들었지만, 좀 더 서울 생활(?)에 적응하고 싶어서였다. 확실히 하루 차이였지만 시험 패턴을 맞추는 것이 수월했다. 다음날 올라온 다른 기맥정 실원이 ‘나도 하루 일찍 올라올 걸 그랬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또 이번에는 숙소비와 교통비의 대부분을 기맥정에서 지원해 주었다. 작년에는 전부 사비로 썼었는데, 부담이 한결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고 돈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건 아니다. 실장 형이 몇 번이고 학교 근처 절에 찾아가 사정사정한 결과였다.


이번에도 상경길은 쉽지 않았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양손에는 전공책 수십 권을 쑤셔 넣은 캐리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넣지 못한 전공책은 내 등의 책가방에 가득 들어있었다. 무거운 짐 탓에, 평소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20분은 족히 걸어야 했다.


그래도 이번 상경길에는 눈앞에서 봉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험도 치기 전에 운을 다 써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졸업식


마침내 두 번째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작년처럼 시험장 건물은 꽤 높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시험장에 가기 위해서는 한양대학교 지하철역에서 내린 뒤, 운동장을 지나 여러 다른 건물들을 가로지르며 꽤 걸어 올라가야 했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던 내 눈앞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파란색 학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별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갔다.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시험이 훨씬 급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건 몇 개월이 지난 한참 뒤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졸업식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졸업식이 언제였더라?” 달력을 보니 2차 시험을 치르는 그날이었다. 당일에 나는 시험을 치고 있었고, 졸업식에는 당연히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6년이 넘는 나의 대학생활은 주인을 잃은 채 막을 내렸다.


난항


시험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낯선 문제들이 많이 나왔고, 나는 곤욕을 치렀다.


첫 번째, 두 번째 과목에서 처음 보는 문제가 나와 당황하였다. 나는 결국 손도 대지 못했다.


세 번째 과목은 그럭저럭 괜찮게 치며 희망을 가졌으나..


마지막 날, 시험지를 펼쳤을 때 굉장히 당황했다. 문제는 너무 어려웠고 낯설었다. 답안지에는 부분 점수조차 받지 못할 의미 없는 수식만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렇게 어떻게 해보지도 못한 채, 휴일을 포함하여 약 5~6일간 진행된 시험은 종료되었다.


“최고”


몇 달 뒤, 2차 시험 발표 날. 전년도에는 친구와 게임하면서 기다리다 탈락의 맛을 봤다. 그래서 이번에는 피시방에서 혼자 기다렸다. 휴대폰을 덮어 놓은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게임에 집중했다.


합격 문자는 합격자에 한하여 정확히 18시에 발송된다. 차마 18시에 맞추어 폰을 보지 못한 나는 계속 컴퓨터만을 바라보았다.


18시 3분. 게임은 잘 안 풀리고 있었고, 얼굴을 모르는 다른 플레이어는 나의 플레이를 지적하며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그냥 연락 왔는지나 보자’.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뒤집어 확인했다.


문자는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는 다시 게임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대처를 잘했고, 방금 전까지 짜증을 내던 플레이어는 ‘최고’를 나타내는 이모티콘으로 나의 플레이를 칭찬하였다.


더블 스코어


다음 날 일찍 성적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커트라인과 평균 10점 차이였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1년간 성장 없이 멈춰있었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솔직히, 스스로 보기에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마지막 날 치른 과목의 점수는 고작 48.33점이었다. 반타작도 안 된다니! 심지어 조금만 더 틀렸으면 과락이었다! 점수가 잘 나온 단 한 과목을 제외하면, 나머지 과목도 마찬가지로 답이 없었다. ‘합격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 충격적인 건, 오히려 작년보다 실력이 더 하락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문제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오히려 합격 가능성은 작년이 더 높아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법률저널(행정고시를 주로 다루는 언론사)에서 수석 합격자의 인터뷰가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링크를 클릭했다. 합격자의 공부법을 배워서 다음번에는 잘 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험에 붙은 데다 수석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접속하자마자 내가 가장 못한 과목을 찾았다. 수석의 점수는 무려 98.33점. 내 점수 48.33점에 두 배를 곱해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큰 격차였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그 과목을 만점 가까이 받은 것인지.


총 네 과목 중, 한 과목의 점수는 내가(88점) 수석(87점)보다 오히려 더 높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자랑할 것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과목에 너무 몰입했다. 공부 시간의 절반 이상을 사용하였고, 공부 밸런스는 깨져 있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 접을까?’


제자리걸음


시간이 지나 틀린 문제들을 분석하며, 내가 많이 부족했었다는 걸 느꼈다. 작년과 똑같이 10점 차로 떨어진 것은 나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과락에 가까운 그 과목은 특히 문제였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시간만 날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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