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은 일상이 매일 똑같을 것 같다. ‘집 - 도서관’만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평화롭고(?) 루틴한 수험생활이 무슨 이유에서건 갑자기 확 바뀔 수도 있을까? 기맥정을 다니던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홀연듯 코로나가 나타났고, 그것은 곧 전 세계를 강타하였다. 경제부터 국제 정세, 국민의 일상생활까지 송두리째 바뀌었다. 세상을 등진 채, 기맥정에서 도를 닦던 나 또한 그 영향권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전국은 비상이었다. 확진자가 언제 어디를 다녔는지에 대하여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사람들은 혹여나 확진자와 동선이 겹칠까 봐 외출마저 삼가기 시작했다. 공식 행사마저 줄줄이 취소되던 그 순간에도, 1차 시험(PSAT) 일정은 다가오고 있었다. 수험생들은 전용 커뮤니티를 통해 우려를 제기하였다. 상황이 이런데 억지로 시험을 강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전국 시험장에는 수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시험을 치른다. 만약 코로나에 걸린 수험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다른 수험생들과 접촉하며, 결국 최소 수십 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할 것 아니냐는 게 수험생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시험 집행 기관(인사혁신처) 측은 시험 연기에 부정적이었다. 시험을 미룬 선례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6.25 전쟁 때에도 행정고시는 진행되었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1차 시험장 중 하나인 대구에서마저 코로나 확진자가 나타났다. 결국 한 국회의원이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며 시험 집행 기관에 압박을 가했다. 그다음 날, 사상 처음으로 행정고시 시험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시험을 치르기 불과 4일 전이었다.
내가 시험 연기 소식을 들은 건, 막 점심을 먹고 돌아와 정신없이 기출문제를 풀던 도중이었다. 시험지를 덮은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몇 주간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심지어 시험까지 겨우 4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험이 미뤄진다는 허탈감. 어찌 되었든 코로나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당장은 1차 시험을 치지 않는다는 해방감. 그러나 결국 그 힘든 1차 시험을 나중에 또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날은 도저히 더 이상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창 1차 시험을 공부하던 나는, 그다음 날부터 다시 1차 시험 일정이 잡히기까지 약 두 달 동안 2차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시험 연기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코로나 확산을 막고자 다인 시설 이용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기맥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기맥정을 이용하던 인원은 고작 3~4명 정도였기에, 위험 지역으로 선정하기에는 실질적으로 부적합하였다. 그러나 행정은 그러한 디테일까지 신경 써주지는 않았다. 결국 기맥정은 사용 정지(폐쇄) 조치를 피해갈 수 없었다.
기맥정의 불은 꺼지고, 문은 잠겼다. 어디서 공부해야 할지 가늠을 못 잡은 나는 처음 3주간 고시원 안에서 공부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활공간 안이라 그런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자꾸 폰을 보게 되었고, 대낮인데도 잠이 쏟아졌다.
결국 학교 근처 스터디카페를 찾았다. 당시 나는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비싼 바닐라라떼 대신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가난한 수험생이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스터디카페 등록 비용은 부담이었고, 나는 대신 식비라도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싸 오기도 하였다. 무거운 수험 서적은 2권만 챙겨도 가방이 꽉 찼기에, 자료도 조금씩만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때문에 공부 중 다른 서적을 보고 싶어도 기맥정에 있을 때와는 달리 그럴 수 없었다. 자연히 공부 효율은 떨어졌다. 고시원에서 스터디카페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로, 은근히 시간도 소요되었다. 이 모든 요인이 겹치며 결국 슬럼프가 발생하였고, 나는 상당 기간을 방황하게 된다.
방역 지침으로, 실외는 물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쓰면 평소보다 숨을 쉬기 불편해진다. 그렇게 산소가 부족해지다 보니, 공부할 때면 평소보다도 졸음이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코로나를 더 잘 막아주는 KF94와 같은 두꺼운 마스크를 낄 때면 더욱 그랬다.
장기간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1차 시험을 칠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나는 마스크를 쓰고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해야 했고,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래서 나는 두꺼운 마스크보다는 그나마 덜 불편한 얇은 마스크를 좋아했다. 숨 쉬기도 한결 편하고, 가벼웠기 때문이다. 대신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은 더 높아지기에, 불안감은 커졌다. 나는 매일 고시원을 나서며, 두 종류의 마스크 중 무엇을 써야 할지 딜레마에 시달렸다.
코로나로 우리 학교의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비대면 수업은 나의 대학생활에 있어 처음이었고, 꽤 신선한 것이었다.
고시를 준비하던 나에게 비대면 수업은 장점이 많았다. 굳이 강의실까지 갈 필요 없이, 노트북만 있으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기맥정과 학과 건물을 왕복할 시간을 절약하였다. 다 같이 모이기가 어려운 탓에, 그 악명 높은 텀프(조별과제)도 없어졌고, 그런 만큼 수업 부담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학점 받기도 유리했다. 우리 학교 규정상, 비대면 수업은 일반 수업에 비하여 높은 학점(A~A+)을 더 많은 학생에게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학교 공부와 고시 공부를 병행하던 나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것은, 그때가 나의 졸업 학기였다는 것이다. 마지막 학교 생활을 비대면으로 장식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아쉬웠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러한 낭만보다는 현실이 더 중요했다. 고시 공부 시간이 하루에 단 몇십 분이라도 늘어난다면, 그까짓 추억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수험생은 술집 출입 등 바깥 활동을 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반인에 비하면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수험생들은 혹여나 자신이 코로나에 확진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해한다. 코로나에 걸리면 스터디카페나 도서관에 입실 제한이 걸려 공부에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취업준비 그 자체에 직접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기업은 코로나에 걸린 응시자가 아예 입사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막기도 할 정도였다. 다행히 행정고시를 포함한 공무원시험은 그 정도로 가혹하지는 않았고, 확진자는 다른 수험생들과는 격리된 공간에서 따로 시험을 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수험생이 코로나에 걸리면 골치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침대에서 고열로 고생하며 소중한 수험기간 며칠을 날려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 직전이나 시험 기간 중간에라도 코로나에 걸린다면, 컨디션의 큰 하락은 피할 수 없었다. 이는 당연히 시험 결과에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결국 수험 기간이 끝날 때까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정말 큰 행운이다.
코로나는 전 세계를 휩쓸며 경제와 문화,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험생도 예외는 아니었고, 변동 없을 것 같던 수험생의 일상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같은 수험생임에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위기로, 누군가에게는 기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설령 합불이 갈라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다행히 나는 ‘큰 위기’를 겪지는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는 등, 코로나에 대응하여 최선의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수험생활에는 큰 차이가 났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공부’를 한다는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나를 비롯한 수험생들은 마스크 착용, 공부공간 이동 등 새로운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해 나갔다. 그러면서 코로나 시국에도 묵묵히,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