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다한 필리핀 세부 막탄섬

여기 그 길

by 연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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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귀신이 씌었는지 맨날 싸돌아다닌다는 말을 중고등학교시절 엄마에게 심심찮게 들었다. 주로 나무라는 말이었기에 언짢게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기본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 모양이다. ‘싸돌아다니다’가 익숙한 여기를 벗어나 가보지 못한 곳을 경험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그러한 일에 목마름을 느낀다. 여건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고 때로는 용기가 부족하여 망설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오면 잡아보자는 게 기본자세이다.

종종 근무하는 직장으로 금융상품 홍보 차 사람들이 찾아온다. 마주하게 되면 양쪽 서로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감정소비가 싫으니 대부분 사전에 거절한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마주 앉게 되는 경우가 있다. 주거래 은행 관계자로 인사차 온 척하던 그가 권하던 금융상품의 미끼는 여행상품권이었다. 적금형태의 보험 상품은 일정기간 납입하면 원금이 보전되며, 월불입금액을 절반으로 하는데 동의해 주었다. 오로지 여행상품권에 낚여 혼자만 계약을 했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난 여행 일정을 구상하며 한동안 설렐 수 있었다. 그렇게 필리핀 세부와 막탄섬을 만나게 되었다.

라푸라푸시

늦은 시간대 비행기로 출발해 새벽 가까이 막탄공항에 도착했다. 보통은 휴대폰 화면에 지역 지명이 뜨는데 여긴 그러지 않았다. 밤거리를 달려 이른 아침 도착한 숙소 이슬라리조트의 첫인상은 낭만적이었다. 밤에도 조명을 끄지 않은 수영장의 파란 물빛이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은은하게 일렁이며 창밖을 서성이게 하였다.

라푸라푸는 이곳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우선 필리핀 원주민에겐 침략자였던 해양탐험가 마젤란을 1521년 막탄 전투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 막탄섬의 영주이며 부족장 이름이 라푸라푸이다. 그는 필리핀의 민족적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또 우리의 다금바리 종류인 생선을 여기선 라푸라푸라 부른다. 귀한 몸으로 분류된 이 고급생선은 잡히는 대로 수도인 마닐라로 옮겨져 여기 사람은 맛보기 어렵다. 그리고 ‘오폰’이었던 옛 지명을 족장의 이름인 라푸라푸로 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처 공원에는 마젤란 동상과 함께 그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들은 국가적 영웅인 라푸라푸와 더불어 자신들에게 신앙을 전파해 주었다고 해서 마젤란에게도 숭배의 마음을 가진다고 한다. 국제공항이 있는 막탄은 세부 본섬과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그래서 ‘막탄 세부 국제공항’이다.

다이빙과 스노클링

필리핀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나 연평균 26도의 열대성 기후로 일 년 내 여름이나 마찬가지다. 관광보다는 휴양을 위한 여행이 대부분으로 정해진 일정도 하루 한 두 개에다 그나마 선택할 수 있어서 자유시간이 많다. 필리핀은 7,600여 개도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바다와 여름을 대표하는 물놀이 체험은 기본사항에 들어간다. 날이 밝자 스킨스쿠버 체험을 하기 위해 ‘포세이돈 다이브’ 글씨가 새겨진 바닷가로 나갔다. 마을의 집과 골목길은 지저분하고 남루해 보였다. 신호등도 없어 사람과 자동차가 마구 엉키고 여기저기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다소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인근 섬을 오가는 주민과 여객을 실어 나르는 선착장에 도착해서 바다와 마주 섰을 때, 이제까지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전경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하늘빛이며 바다색이다. 더할 나위 없이 푸르고 양양한 바다가 여봐란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냥 종일 바다만 바라봐도 좋을 것만 같다.

새로운 기회를 만날 때마다 앞으로 언제 또 경험해보겠나 싶은 마음에 용기 내어본다. 남들 따라 스쿠버 슈트와 물안경, 산소통을 매는데 벌써 숨이 차다. 그리 깊지 않은 연습구역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다. 물속에서 숨 쉬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우리 바다보다 자외선과 염도가 2~3배 높다는 바닷물에서 몸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호흡도 생각처럼 안 쉬어져서 갑갑하고 두려웠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이다. 물과 친하지 않고 훈련이 안돼서겠지만 땅에서의 자유로운 호흡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어느 정도 연습 후 자신 있으면 멀리 나가보라고 했으나 바로 포기하고 올가미에서 벗어나듯 빠져나왔다.

다음날은 배를 타고 나가 줄낚시와 스노클링 체험에 도전했다. 다소 큰 배에 여러 패키지여행팀이 함께이다. 햇빛만 가린 포장아래 얼기설기 막대기가 받치고 있는 난간은 허술하다. 위험하니 기대지 말라는 배의 몸통 양쪽으로 나무 기둥이 날개처럼 물 위에 펼쳐져 있다. 관광객 상대로 생업을 이어가는 현지인이 사진도 찍어주고 안전을 담당하며 물속 체험을 도와준다. 혹시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구해주세요나 살려 달라 같은 말은 이곳에서 별 소용이 없단다. ‘100달러!’라고 외치면 너도나도 물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에 다들 웃는다. SNS 사진에 다수 등장하는 열대어 줄낚시는 현지인이 건네준 낚싯줄을 물속에 넣고 흔들다가 작은 열대어가 딸려 올라오면 환호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정말 물고기가 낚시에 걸린다기보다 미리 준비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만의 생각일까. 빵을 으깨어 뭉친 먹이를 들고 물속의 무리 지어 다니는 열대어 떼를 구경하는 스노클링 역시 내겐 고역이었다. 가랑잎처럼 떠다니는 몸뚱이를 주체 못 하겠고, 먹이로 몰려드는 열대어 무리의 아름다운 물속 세상보다, 함께 헤엄치며 물아래 열대어 구경을 돕는 현지인과 소통 어려운 불편함이 앞섰다. 자존감이 훅 떨어져 그냥 괴로움의 시간이었다. 겨우 그만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남보다 일찍 갑판으로 올라와 멀리 하늘과 바다 풍경을 즐기며 너절해진 존재감을 달래었다. 진즉에 수영이라도 배워둘걸 하는 후회를 덧붙이며.

막탄 산토니뇨 성당

필리핀의 종교는 80%가 가톨릭이나 그 외 종교도 다양하고 종교기념일마다 시장이나 대통령이 쉬고 싶으면 휴일로 정하기에 공휴일이 많다고 한다. 마젤란의 모자 모양을 본떴다는 성당마당 가득 만국기 같은 삼각 파티플래그가 건물 지붕을 꼭짓점 삼아 아래까지 펼쳐져 나부끼고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며 놀란 것은 막힘없이 뚫린 외벽이었다. 제단 있는 정면과 나머지 기둥 부분을 제외하고 쇠창살 무늬로 그냥 바람이 드나드는 벽이었다. 추위와 찬바람 피할 일이 없는, 일 년 내내 따뜻한 나라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산토니뇨는 ‘아기예수’란 뜻으로 세부의 수호신인 검은 아기예수상이 모셔져 있는 세부 산토니뇨 성당은 1565년에 지어진 유서 깊은 관광지이다. 막탄 산토니뇨 성당은 작지만 의미는 같을 것이다. 검은 아기예수상도 제대 옆에 놓여있다. 결혼식이나 지역 행사가 열리면 경찰이 출입을 통제해 들어갈 수 없다는데 당일은 조용했다. 햇살도 피할 겸 바람이 드나드는 성당 안 의자에 제법 오래 앉아있었다.

지프니와 트라이시클

필리핀은 오래 미국지배를 받아온 총기 자유국으로 치안이 불안한 편이다. 섬나라지만 물 부족국가이며 그마저도 석회질 물이라 그냥 마실 수 없다. 비닐봉지에 담아 가는 일회용 생수자동판매기를 시장에서 보았다. 이곳의 대중교통은 미군 트럭을 개조해 만든 지프니와 오토바이를 개조한 트라이시클, 그리고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데 택시요금은 부르는 게 값이다. 지프니는 차마다 높이와 폭이 다르고 지하철처럼 옆으로 앉는다. 차도와 인도 구별이 없는 길을 달리면서 먼지와 매연을 그대로 맞아야 한다. 거리는 한국 사람이 많아 한국인지 필리핀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리조트 조식을 제외하곤 삼겹살 구이, 낙지볶음 등 쉽게 한식을 먹을 수 있다. 필리핀에 유기농은 없으니 가능하면 반 건조 망고제품을 사지 않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한 때 인기폭발이었던 제품 공장에 가이드들이 방문했다가 다량의 방부제 첨가를 확인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트라이시클은 오토바이 옆으로 사람이 더 탈 수 있도록 만든 교통수단이다. 당연히 안전감은 없다. 체험 삼아 시장구경 후 리조트까지 짧은 거리를 타고 왔다. 먼지 날리는 길거리 상가 앞에 남다른 외모를 보이는 투계용 닭들이 보인다. 군살 없이 날카롭게 뻗은 목선마저 서늘한 느낌이었다.


정해진 일정 외는 한 번도 리조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리조트가 망망한 바다 위의 섬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만족스러웠다. 이런 게으른 여행도 나쁘지 않구나 싶다. 마지막 날 기념품 숍을 가기 위해 다리 건너 세부 본섬에 들어갔다. 교통 체증으로 자동차가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코피노 어린이재단을 후원하는 상점에 들렀을 때 간단한 기념품을 샀다. 오후 5시 비행기에 올랐다. 해가 지고 어두운 하늘 저 멀리로 번개가 번쩍인다. 소리 없는 번갯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광경을 알아챈 사람은 없어 보인다. 문득 생텍쥐페리의 서신문구가 떠올랐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쓴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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