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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버섯들깨죽이 녹인 마음의 성벽

by 채움


#1.

오랜만에 주말 모임에 나섰다. 남편의 오랜 친구 모임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남편이 늦게 결혼한 터라, 내가 모임에 합류한 것은 가장 최근이었다.


주말이면 삼삼오오 공동육아를 하고, 방학이면 다 같이 여행을 갈 만큼 그들의 사이는 끈끈해 보였다.

빌어먹을 울렁증 때문인지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속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에게 그 모임은 마치 견고한 성처럼 느껴졌다. 남편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늘 그 성 바깥의 경계선에서 서성이는 기분이었다.


혼자 장난감을 부스럭 거리며 노는 아이를 돌보다가 남편과 교대를 했다. 몇 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이지만, 혹여나 실수를 할까, 폐를 끼치진 않을까 싶어 자연스레 몸이 경직되었다. 어렵게 말문을 열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에 언니들은 일제히 나를 걱정하며 안부를 물어주었다.


- 괜찮아? 많이 힘들지?

- 아, 나 그거 어떤 건지 알아. 그리고 거기 주변에 아무 것도 없잖아, 밖으로 나와야 되는데..

- 안 되겠다. 연락해. 바깥바람이라도 쐬러 가자!


사소한 온기가 켜켜이 쌓여 내 마음을 건드린 걸까.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호르몬 핑계를 대며 손사래를 쳤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육아를 하면서 다잡고 억눌러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다.

결국 나는 그날 눈이 붓도록 펑펑 울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가운 가을밤 공기를 가르며 도로 위 가로등은 끝없이 일렁였다. 퉁퉁 부은 눈으로 불빛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비로소 그들의 마음이 보였다. 나만 그 거리가 어렵고 부담스러웠겠나. 성 바깥에서 서성이는 나를 배려하느라, 어쩌면 먼저 다가오고 싶어도 언니들 역시 망설였을 것이다. 나는 안부를 물어주는 그들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마음의 벽도 와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2.

밤새도록 퉁퉁 부은 눈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마음만큼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아침이었다.

그 따뜻함을 조금이나마 이어가고 싶어 버섯들깨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가을은 쉴 틈 없이 지나가 버리고, 아침저녁으로 찬 공기가 집안을 가득 메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데워줄 음식이 필요했다.

마음까지 데워준다면 더욱 좋을 일이고.


쌀을 불리고, 표고버섯과 느타리버섯을 잘게 썰어 들기름에 달달 볶았다. 들기름의 고소함이 부엌 가득 퍼지며, 기름이 톡톡 튀는 소리에 어제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쌀과 버섯이 어느 정도 볶아지면, 들깻가루를 듬뿍 넣고 물을 붓는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들깨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러고 보니 죽을 만드는 과정은 꽤나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 약한 불에서 주걱으로 바닥을 긁어가며 끊임없이 저어줘야 눌어붙지 않기 때문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이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지만 따뜻하고 든든한 죽 한 끼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3.

죽이 끓는 동안, 전날 모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를 걱정하던 목소리, 진심이 담긴 눈빛. 그 위로가 마치 쌀알 하나하나에 깊숙이 스며드는 들깻가루 같았다.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한 숟가락 뜨자, 고소하고 묵직한 온기가 몸과 마음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죽 한 그릇을 비우며 그간의 관계들을 되짚었다.

어떤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고 진한 풍미를 더했지만, 또 어떤 관계는 맹탕에 소금만 친 것처럼 쉽게 흩어져 버렸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 것을 아낌없이 내줄 수 있어야 한다. 관계가 눌어붙지 않도록 느긋하게 저어주는 정성을 쏟고, 상대의 마음이 익을 때까지 기다림의 물도 계속 채워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들깻가루처럼 묵직한 진심까지 더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든든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


밖에서 바라보던 '견고한 성'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부담감과 어색함 뒤에 숨어 있어서는 안 된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제껏 그 성벽 앞에서 기다리기만 했을 뿐, 먼저 나의 정성을 보탤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성은 두려움이 아닌, 온기로 가득했다. 이제는 성 안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이날의 따뜻함과 위로를 연료 삼아, 다음 모임에는 내가 먼저 따뜻한 안부를 건넬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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