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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낫또 먹고 어른됨. 스위치 ON

by 채움



때때로, 아침 식탁 앞에서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분주한 아침의 1분 1초를 분단위, 초단위로 잘게 쪼개고 다져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빚어낼 때.

냉장고 속 재료만 보고도 레시피 없이 눈대중으로 뚝딱 차린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을 때.

그리고 오늘처럼, 이렇게 새로운 음식의 세계에 눈을 떴을 때도 그렇다.





#1.

며칠 전, 아이를 재우고 유튜브를 보다가 낫또에 밥을 비벼 먹는 한 아이를 보았다.

낫또는 우리 가족에게 평생 먹어본 적 없는, 아니 '안 먹는' 음식 리스트에 속한다.

된장찌개나 청국장은 자주 끓여 먹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낫또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콩을 찌개가 아닌 생으로 먹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끈적하고 길게 늘어지는 콩의 점액질이 마치 콧물처럼 보여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면 속, 내 키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스머프 반바지만 한 어린아이가 낫또 한 팩을 밥에 슥슥 섞어 먹는 모습이 묘하게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우리도 이 낯선 맛에 도전할 수 있을까, 내가 안 먹는데 아이가 먹으려나.


다음 날 아침, 호기심 반, 불안감 반으로 낫또를 꺼냈다. 아이는 처음 보는 비주얼에 잠시 주춤했지만, 눈앞에서 휘황찬란하게 섞이는 콩의 모습에 이내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콩 하나를 집어 아이 입에 넣어주자 아이의 눈은 보름달처럼 동그래졌다. 다시 김에 싸주기를 몇 번, 아이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고는 빈 그릇을 탕탕 치며 더 달라는 시위를 했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아이의 폭발적인 반응에 나도 부응을 해야 될 것 같았다. 여전히 끈적이는 점액질은 부담스러웠지만, 어른으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줘야 되는 순간이었다.


- 엄마는 그럼 간장 소스를 넣어서 먹어볼게!


나름의 보험을 들고자 조미 간장 소스를 때려 붓듯이 넣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크게 한 입 떠 넣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생각보다 냄새도 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간장의 짭짤함과 콩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부담 없이 넘어가는 것이었다. 어라?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2.

사실 낫또는 단순히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발효의 과정을 거치며 혈관에 좋은 효소를 품고 있고, 장 건강에도 탁월하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끈적하고 길게 늘어지는 특유의 점액질과 낯선 비주얼이 너무 강렬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콩 덩어리를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받아들이며, 나는 오래 미뤄둔 숙제를 푼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소소한 성공은, 나의 삶 속에서 갖가지 이유들로 회피했던 '낯설지만 이로운 존재들'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때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에 나는 숨도 쉬지 않고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 오빠, 낫또 먹어봤어? 우리 오늘 낫또 도전했는데 성공했다!


이토록 뜨겁고 흥분되는 순간. 하늘에서 돈이 다발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거창한 사회적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단지 태어나 처음으로 먹는 음식이 성공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수십 년간 묵혀둔 '낯섦에 대한 거부감'을 스스로 이겨냈다는 성장의 증거이기도 했다.


낫또는 내게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가르쳐주었다. 콩이 발효되어 낫또로 변하듯, 낯선 경험과 크고 작은 도전들이 우리를 조금씩 익어가게 한다. 어른이란, 수많은 낯섦 속에서도 새로운 세계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닐까.


30년 넘게 외면했던 낫또의 끈적함과 맛에 눈을 뜨게 된 순간, 나는 생생하게 어른이 된 나 자신을 실감했다.




아직은 작은 입이라 낫또를 잘게 다져 밥에 비벼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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