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0. 대장 철새의 지도를 물려받은 날

: 우리의 첫 계절갈이, 새우 한 접시에 담다.

by 채움


결혼하기 전, 계절이 한 번씩 바뀔 때마다 우리 집은 늘 분주했다.


봄에는 미나리와 새조개,

여름에는 매실과 오징어,

가을에는 갓김치와 고들빼기,

겨울에는 과메기.


장롱 속 묵혀둔 이불과 옷을 바꿔 꺼내듯, 제철 음식으로 계절갈이를 하는 것이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였다.


주말이면 아빠는 지도를 펼쳐 들었고, 엄마는 나갈 채비를 했다. 어린 손에 쥐어진 작은 땅덩어리를 보며 어떤 날은 섬진강으로, 또 어떤 날은 동해 바다로 향했다.

그 모습은 마치 철새와도 같았는데, 산책이 취미요, 걷기가 특기인 '대장 철새' 아빠의 버프를 받아 우리는 어린 시절 여러 곳을 누비며 계절을 따라다녔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푸른 밭과 바다 내음, 낯선 식당의 풍경은 그 자체로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1.


좋은 기억은 오래 남는 법이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무렵, 나는 다짐했다.

우리 가정만의 계절 지도를 만들어 보자고. 철이 바뀔 때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우리가 뚫은 길에서 계절갈이를 하자고 말이다.


신혼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 아이가 생기며 계획은 잠시 미뤄졌지만, 드디어 이번 주 새우로 첫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집 근처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우리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 들뜬 마음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겹겹이 챙겨도 끝이 없는 육아용품 가방을 메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온평을 챙기면서도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아이는 진작에 아침밥을 먹었지만,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육아에 우리 부부에게는 아침 겸 점심이 되는 셈이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가을날, 아이와 남편과 함께 떠나는 길은 더없이 청량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수산물 판매장에서 손바닥만 한 새우를 샀다. 비닐봉지 속에서 사정없이 튀어 오르는 새우들을 보며 나는 봉지를 쥐는 둥 마는 둥 차에 올라탔다.

'집에 갈 때까지 살아 있으려나? 저걸 어떻게 요리하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툭툭- 움직이며 존재감을 알리던 새우들은 집에 도착해서까지 난리법석이었다.

소금구이를 위해 은박지 접시에 올려놓자마자 한 놈이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나는 뚜껑으로 재빨리 새우를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떨어진 새우를 주워 입으로 가져갔다.


"안 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지지!"

다급함에 손사래를 쳤고, 남편은 튀어 오르는 다른 새우들을 막으며 "뚜껑! 뚜껑!!"을 연신 외쳤다.

폭탄만 안 터졌지, 부엌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간신히 뚜껑을 닫자 '투둑-'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폭풍우가 지나간 부엌에서 벌어진 환장대잔치의 첫 계절갈이였다.




#2.


어수선한 부엌과 달리 새우구이는 성공적으로 막을 올렸다. 활처럼 몸을 구부린 채 잘 익은 새우를 보며 우리는 첫 계절갈이가 이렇게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 가을에는 새우로 시작해 보자.

- 좋아! 봄에는 봄동 비빔밥이랑 생미나리 김밥도 넣자.


새우 칼국수를 먹으며 계획을 짜는데, 문득 대장 철새였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도와 표지판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그러면서도 우리를 바라볼 땐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 뒷모습.

대장 철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가족을 이끌고 계절을 따라가는 그 발걸음 속에는, 함께 채워가는 삶의 기쁨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계절은 늘 제자리를 찾아오고,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쌓아간다. 나 역시 아빠처럼 그렇게 우리 가족의 삶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비록 거창한 여행은 아니지만, 소소한 하루가 모여 또 하나의 계절 지도가 될 것이다.


이제는 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지도를 펼쳐 들 때이다.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지도를 들고 함께 다닌다면 더 실감이 나겠지. 새우 한 접시에도 웃음과 추억이 담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언젠가 아이의 기억 속에서도 오늘의 풍경이 오래도록 남아, 또 다른 계절갈이의 출발점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2화#59. 미역줄기볶음으로 용기를 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