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12년 동안 숙성시켰던 배추를 꺼내놓는 날입니다.
하루에도 초여름과 겨울을 오가던 계절의 변덕이 있었다. 하지만 11월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기온이 뚝 떨어졌다. 거리에는 차갑고 묵직한 공기가 감돌았다.
- 11월이 오기는 오는갑네.
해마다 이맘때 즈음이면 아이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올해도 역시 수능을 보는 아이들, 가르쳤던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부를 묻거나, 그간 하지 못했던 속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그들과의 연락은 11월 셋째 주가 단순한 계절의 끝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젯밤 자기 직전에 만들어 놓은 새빨간 겉절이 양념이 떠올랐다.
오늘은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절여져 온 배추를 꺼내놓는 날이다. 시험장에 들어선 수험생들에게 지난 시간은 몸과 마음을 절여온 인고의 날들이었을 것이다. 어떤 배추는 푹 절여져 속까지 야들해졌을 테고, 또 어떤 배추는 겉에만 살짝 간이 밴 채 긴장감 속에 놓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됐든 그 묵직하고 답답했던 숙성의 시간은 이제 이 하루로 끝이 난다.
삶은 정답이 정해진 시험지도 아니고, 완성된 결과물도 아니다.
그러니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메시지의 끝에 이런 케케묵은 위로들을 덧붙이곤 하지만, 당분간은 아이들의 눈과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나도 그랬으니까. 잠시라도 멈추거나 쉬면 낙오자나 실패자처럼 느껴지는 '빨리빨리'의 압박이 청춘들을 짓누른다. 사실 막 시험을 끝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양념'에 자신을 버무릴 용기이지 않을까.
갓 무친 배추 겉절이에 밥을 비벼 먹으며 올해 수능을 보는 제자들을 생각했다. 강렬한 붉은색이지만, 입에 넣으니 싱그러운 아삭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제자들은 싱그러운 아삭함과는 사뭇 대조되는, 길고 긴 '절임의 시간'을 보냈었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를 마주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학기의 절반을 컴퓨터 화면 앞에서 보내며 "학교는 언제 가요?" "선생님, 저희 보고 싶지 않아요?"라고 징징거리던 녀석들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긴 비대면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우리 반은 늘 시끌벅적했다.
학교에 오지는 못했지만, 다른 공간에서도 충분히 학교 생활을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주마다 이벤트를 열었고, 점심시간에는 다 같이 줌방에 접속해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개중에는 요리 솜씨가 좋은 친구도 있어 요리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내주기도 했다.
수업시간에는 말도 안 되는 마스크와 턱수염을 쓰고 '토끼와 자라'를 낭독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수업이 끝나는 게 아쉬워 쉬는 시간 종이 끝날 때까지 방을 나가지 않고 수다를 떨거나, 그림판에 그림을 끄적이며 맞추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월요일에는 또 지긋지긋한 줌방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좀먹지 않도록, 일요일마다 생존 신고를 하며 서로를 다독이고 격려했다.
제한된 상황이었지만 그럴수록 더 똘똘 뭉쳤다. 그것이 빛을 발한 걸까. 결국 그 해 학년 통틀어 원격수업 참여도가 가장 높은 반이 되었다. 혹독한 비대면 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버텨낸 강한 아이들이었다.
보지 못한 시간이 더 길지만, 아마 그간의 묵은 시간 동안 그들은 단단히 절여진 귀한 재료가 되어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화려한 상패나 점수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단단함으로 새로운 세상 앞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오랜 숙성의 무게를 털어내고 겉절이처럼 생생한 아삭함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무쳐내기를 바란다. 세상의 소음에 휩쓸리지 말고, 아이들만의 맛으로 정답 없는 삶을 멋지게 버무려 나가기를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