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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믹스커피에게 바치는 고별사

by 채움



#1.

- 나 다이어트 할 거야.

- 나도 할 거야.

- 아니 아니, 오빠 그게 아니고 진짜 할 거라니까.

- 어어, 나도 마찬가지라고.


지난 금요일, 우리 부부는 드디어 칼을 뽑았다.

남편은 건강 관리를 위해 야식을 먹지 않았고, 나는 야식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었기에, '야식과 몸무게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둘이 무슨 재미로 살아? 밤에 야식 먹으면서 수다 떠는 맛이라도 있어야지! 결혼은 그 재미에 사는 건데!" 라던 동료 선생님의 말을 듣고도 얼레벌레 웃으며 넘어가던 우리였다. 야식은 참으면 또 참아지는, 충분히 컨트롤 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컨트롤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4시간 강철 체력의 아이 때문에 다리만 풀릴 줄 알았더니, 그간 잘 간수하고 있던 이 요망한 입까지 풀리게 된 것이다.

야식을 시켜 먹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날은 체력이 바닥이라, 어떤 날은 육아 과정에서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으니 치유한다는 명목하에, 어떤 날은 "아 몰랑 그냥 기분이 째져, 흔들어재껴!" 하며, 또 어떤 날은 그냥 입이 심심하니 의무적으로. 그렇게 먹었던 야식이 한 트럭이었다.

하지만 사실 고백하건대, 야식보다도 나를 더 살 찌운 범인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믹스 커피'였다. 늘어난 지방 덩어리의 8할은 아침, 저녁으로 타 먹는 이 죽일 놈의 노란 스틱 때문이 분명했다. 급식 후 한 잔씩 마시던 습관은 이제 중독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안 마시면 입이 심심하다 못해 금단 현상까지 느껴질 지경이었고, 육아를 하면서 그 양은 순식간에 2-3개로 늘어났다.


믹스 커피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가끔은 샌드위치와 함께 먹기도 한다.


오죽하면 육아에 지쳐 잠시 쓰러져 있을 때, 아이가 어디선가 믹스 커피 스틱을 들고 와 건네주겠나. 아이는 이제 우리 부부 둘 중 하나가 쓰러져있으면 늘 장난감 커피잔과 믹스 커피를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 걸까. 커피를 먹고 더 열심히 육아를 하라는 뜻인 걸까. 웃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먹으라고 연신 들이미는 노란 스틱을 넙죽넙죽 받고, 뜨거운 물을 끓인다. 믹스 커피는 입천장이 데일만큼 뜨거울 때 마셔주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해 그 원칙을 고수 중이지만, 육아 중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마시지 못해 식어빠진 커피를 마주할 때가 더 많다. 그런 날에는 보란 듯이 보상 심리가 생겨 어떻게든 다시 한잔을 더 타서 먹기도 했다.



믹스커피 그.. 그만…!



#2.

하지만 더 이상 이 악순환의 굴레를 용납할 수 없다. 어느 날부터인가 불어난 몸뚱이와, 몸에 이상 징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피곤함을 없애기 위해 아침에 의무적으로 들이켰던 믹스 커피는 내성이 생겼는지, 이제는 마셔도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치고 에너지가 부족함을 느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바닥이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느낌까지 받기 시작했다. 단순히 철분이 부족한가 싶기에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쿵쾅거리는 횟수까지 점차 늘어났다. "야! 작작 좀 마셔! 이러다 다 죽어!" 몸 안 구석구석 세포가 뜯어말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아쉽지만, 내 몸을 갉아먹는 이 달콤한 중독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믹스 커피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최후의 선언을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아, 물론 하루아침에 믹스 커피를 당장 끊을 수는 없다. 사다 놓은 박스 안에는 아직 다 먹지 못한 믹스 커피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 딱 이것만 다 먹으면. 이것만 다 먹고. 더 이상 먹으면 인간이 아니지. 정신 나간 사람 마냥 수십 번을 중얼거리며 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믹스 커피와의 이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노란 박스만 보면 괜히 마음이 애틋해진다. 이는 남아있는 스틱들을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즐기고 싶은 또 한 번의 보상 심리로 이어졌다.


어떤 음식이랑 같이 먹어야 맛있다고 소문이 날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민을 거듭하다가 냉동실 깊숙이 박혀 있던 츄러스 봉지를 꺼냈다. 아침 댓바람부터 믹스커피에 츄러스라니. 이게 아침이 될 수 있는 건가.

엄마가 알면 호되게 등짝을 맞을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육아가 다 그런 거지. 이거 먹고 육아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사유를 늘어놓으며 에어프라이어에 츄러스를 돌렸다. 그리고 한결같이 뜨거운 믹스커피도 한 잔을 내렸다.

다이어트 선언이고 나발이고, 일단 남아있는 노란 스틱들을 가장 행복하게 즐기는 것이 수많은 고비를 함께 넘긴 전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의자 의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뜻하게 데운 츄러스에 시나몬 슈가를 듬뿍 묻혀 입에 넣었다. 바삭한 식감이 폭발한다. 거기에 믹스커피의 끈적한 단맛이라니. 온몸의 쾌락 중추가 '도! 파! 민!'을 외치며 폭주하는 기분이다. 단언컨대, 이 조합은 육아로 지친 지금의 나를 다독이는 가장 확실한 위로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죄책감 대신 뜨겁게 달구어진 노란 스틱을 천천히 음미하며 그의 공적을 기려 본다. 친애하는 나의 믹스 커피여, 지금 이 잔을 들어 너와의 마지막 낭만을 노래한다. (feat. 다큐멘터리 3일 '낭만 어부' 응용)




한 잔은, 지독했던 육아를 함께 버텨준 나의 육아 전우를 위하여.

한 잔은, 너와 나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잔은 네가 사라지고 다시 초라해질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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