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경 세상이다. 돈을 내고 흙을 만지는 세상이라니. 어른 비용까지 합쳐 2만 원이 훌쩍 넘는 체험비를 내고 흙을 만진다. 심지어 노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아서 보내준다.
모래를 뭐? 돈을 주고 만져? 집 앞 공터만 나가도 모래 만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옛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교가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다니며 놀이터와 공터를 전전하던 때가 있었다. 으레 3-4시가 되면 집 앞 공터는 감자 머리들로 꽉 차 있었고, 저녁 무렵이면 다들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귀가를 했다.
놀이도 다양했다. '약자들은 범접 불가'라는 놀이터 안에는 틈만 나면 손가락이 찝히던 그네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야 제맛이던 텅텅이 미끄럼틀,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면서 담력을 키우던 정글짐이 있었다. 그야말로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흙바닥에서 뒹굴고 집에 와서 등짝 스매싱을 맞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이제는 그 경험을 돈을 주고 체험해야 한단다. 이 의뭉스러운 현실에 남편과 나는 여러 가지 꼬리표들을 머릿속에 둥둥 띄웠지만, 막상 아이가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잘 왔다 싶어 서로를 다독인다.
얼마 전 아이와 농장 체험을 했다. 계절에 맞는 제철 채소들을 수확하고,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감자와 무를 수확했다. 체험을 하는 아이들 가운데 제일 어린 꼬꼬마 농부였다. 손이 작아 맞는 장갑이 없었지만, 아이는 성실하고 묵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언니, 오빠들 틈바구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한차례 휩쓸고 간 자리에 홀로 남아 감자를 캐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그녀는 "소듕한" 농작물을 획득했다.
양가에 보내드릴 감자를 배분하고, 남은 것은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수확한 무였다. 흐르는 물에 흙투성이 무를 닦는데, 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신중하게 무를 고르던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났다. 흙투성이 무에는 아이의 땀과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물론 부모의 땀이 8할이지만) 이 귀한 노동의 결실을 단연코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먹어주마!"라는 결연한 마음으로 무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드글드글 들기름에 무를 볶으며, 그보다 더 작은 아이였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조리원에서 또래 아이들보다 적게 나가는 체중 때문에 모자동실 시간만 되면 죄인처럼 다니던 게 엊그제 같다. 60ml도 채 안 되는 분유를 매번 토해 울며불며 아이에게 맞는 분유를 찾던 때가 있었는데.. 칠흑 같던 걱정의 시간들을 흙 속의 무처럼 단단하게 견뎌냈구나 싶어 만감이 교차했다.
아이에게 밥과 함께 먹을 무 요리들을 건넸다. 평소 의자에 앉아 곧잘 먹던 아이가 어쩐 일인지 베란다 창문을 가리킨다. 밖에서 먹는 밥이 더 맛있다는 것을 벌써 안 걸까. 수확의 벅찬 감동을 느꼈던 그날의 기억을 따라 아이는 햇살이 내리쬐는 곳으로 향했다.
무를 뽑던 날의 작은 노동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자신이 수확한 무라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흙을 돈 주고 만져야 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지만, 아이는 적어도 노동의 결실이 어떤 맛인지 가장 정직하게 배웠다.
무를 요리하는 과정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불에서 뚜껑을 덮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무의 단단함이 사라지고 깊은 맛이 배어난다. 그리고 단단함이 부드러움으로 바뀌는 순간, 무는 식탁 위에 다양한 요리로 변신할 수 있다.
아이의 성장도 이와 같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자란 무처럼 아이 또한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수많은 경험과 깨달음을 축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얼렁뚱땅 꼬꼬마 농부이지만, 이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삶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확장될 것이다.
무청을 삶아 들깨와 된장으로 무친 것처럼, 아이의 삶에도 때로는 쌉쌀한 추억과 고소한 위로가 더해질 것이다. 뜨끈한 소고기 뭇국을 먹으며 마음의 감기를 이겨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인고의 시간을 겪으며 속까지 단단하고 알찬 무처럼 자라나기를 응원한다. 아이의 첫 땀으로 얻은 이 무가, 삶을 지탱하는 값진 자양분이 될 수 있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