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식 식단표 사용 설명서
"오빠, 이번 달 식단표 나오면 한 장 넘겨줘요!"
매월 첫째 주, 남편이 일하는 학교의 급식 식단표를 받는 건 나만의 작은 루틴이다.
출산을 앞두고 학교를 쉬는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는 식단표가 하나뿐이다. 예전 같으면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식단표도 출력해서 붙여뒀겠지만, 지금은 남편의 학교 메뉴가 우리 집 아침 식단 구성의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남편이 건네준 식단표를 보며, 좋아하는 메뉴나 참고하고 싶은 요리에 형광펜을 칠한다.
관심 있는 메뉴의 레시피를 찾아보거나 남편과 식단을 두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밥상을 차리는 것만큼이나 좋아하는 과정이다.
나는 급식에 진심인 편이다.
급식을 먹기 전이라면 아이들과 함께 어떤 조합으로 밥을 먹어야 쩝쩝박사가 될 수 있을지 열띤 토의를 하고, 급식을 먹은 후라면 으레 “오늘 점심 어땠어? 맛있게 먹었어?”라는 질문으로 오후 수업의 문을 열었다.
매월 첫째 주가 다가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식단표를 출력해 교무실에 나눠주고, 내 자리 뒤 사물함에는 늘 형광펜으로 색칠한 식단표를 붙여두었다.
식단표는 내 자리의 풍경이자 아이들과의 대화의 문이었다.
교무실에 용무가 있어서 온 아이들은 슬쩍 내 자리로 와 메뉴를 확인했고, 어떤 날은 급식 메뉴 자체가 주인공이 되어 쉬는 시간 10분을 통으로 아이들과 이야기하다가 끝이 난 적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더 분주해진다.
급식 대신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려는 아이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젤리 압수! 오늘 7교시까지 하는데 급식을 왜 안 먹냐. 이따가 학원도 가야 된다면서 어떻게 버티려고~!"
"아 쌤, 오늘 급식 진짜 맛없어요.."
"쌤! 얘 어제도 안 먹었어요!"
"야!! 말하지 마!"
자연스럽게 점심식사와 관련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 또한 일상이 되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교무실로 불러 급식실에서 가져온 빵이나 과일을 챙겨주기도 했다. 그게 뭐였든지 쫌쫌따리 지렁이 젤리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야, 이거 먹느니 국에 밥 말아서 한 그릇 먹고 오겠다"
같이 놀러 온 아이들과 희희낙락 웃고 떠들다 보면 나의 점심시간은 후딱 지나가있었다.
식단표는 시험지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창구였다. 그 위에 담긴 메뉴들은 아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이자, 서로에게 관여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식단표에 대한 애정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식단표를 활용해 서로의 하루를 열고, 자신의 취향을 공유했다.
매일 바뀌는 학교의 급식 메뉴는 '집-학교-학원-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단조로운 일상에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급식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한 끼가 아닌, 하루의 스토리텔링이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급식 식단표 팔찌’.
이 팔찌는 매번 종이 식단표를 들고 다니긴 불편하다는 아이들의 불만 끝에 고안된 것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 주 단위로 구성된 식단표를 잘라 일렬로 길게 붙이고 앞뒤로 접어준다.
- 맨 앞장과 뒷장은 표지를 붙여 책처럼 만들고 구멍을 뚫어 손목 사이즈에 맞게 고무줄로 묶어주면 끝.
*앞/뒷장 표지 디자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좋아하거나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메뉴를 미리 형광펜으로 색칠해 놓는다면 훨씬 있어 보임.
아이들의 가느다란 팔목에 붙어 달랑거리던 작은 수공예품은, 사춘기 아이들이 자신의 취향과 감정을 드러내는 작고도 유쾌한 방식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교내를 돌며 팔찌를 자랑하고 서로 바꿔보는 사이, 식단표는 일상의 패션이자 놀이가 되었다.
나도 물론, 그 흐름에 당당히 동참했다.
교무실 책상 위엔 ‘교사용 팔찌’가 놓여 있었고,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급식 라인업’을 두고 하하 호호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웃음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학교의 소리였다.
지금은 교실이 아닌 부엌에서 식단표를 펼친다.
식단표는 여전히 나의 계획표이고, 우리 집 아침 식단 구성을 위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월요일: 그래도 한 주의 시작이니 파이팅의 의미로 든든한 백반 느낌의 식단.
- 수요일: 잔반 없는 날이라 대개 맛있고 헤비한 것들이 나오므로 아침 메뉴는 최대한 간단하게.
- 금요일: 평일의 마지막이니 가볍고 설레는 마음으로 김밥이나 유부초밥.
- 텀블러 데이: 가끔 서브 음료 등이 나오는 날로 아침 주스는 패스.
- 과일채소 주스는 일주일에 2-3번, 샌드위치 만드는 날에 함께 먹기.
점심 메뉴와 재료가 겹치지 않도록 구성하며, 아침은 손으로 집어먹기 편한 핑거푸드 위주로 준비한다.
가끔 냉장고 파먹기 기간이나 긴축 재정 등의 상황이 발생하면 대개 이 틀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인다.
이 모든 것에 식단표가 일조한다.
주말을 뺀 5개의 칸을 하나씩 지우다 보면 어느새 한 주가 된다.
그렇게 모인 날들이 낱알처럼 쌓여 한 달이 되고, 그 사이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매일을 살아낸다.
하루하루 자신의 가치를 다듬어가는 삶은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신가.
식단표 역시 나름의 준비를 한다.
공중에 흩어지던 메뉴들은 재료나 성분, 주제에 따라 조합되고, 하루를 이루는 식단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급식 라인업이 미쳤다'는 아이들의 호들갑은 식단표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지도 모른다.
잘 짜인 식단표를 보며 “이번 달은 잘 살아봐야지” 다짐한다.
갓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리듬으로 사는 삶. 그 리듬을 찾게 해주는 작고 확실한 장치가 바로 식단표인 것이다.
식단표는 여전히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아이들과 소통하던 창구였고, 우리 집 밥상 계획표였고, 가끔은 지친 일상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친구였다.
어느 날은 단순한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또 어떤 날에는 그날의 기분을 좌우하는 이벤트가 되기도 했다.
‘아 오늘은 제육이네’라는 한 줄의 문장이, 어떤 날엔 커피보다 더 빠르게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뭐든 적당히 기대할 거리가 있다는 건 꽤 괜찮은 삶의 방식인 것 같다.
오늘 당신 주위엔 어떤 ‘형광펜으로 칠한 급식 메뉴’들이 숨겨져 있을까?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찾아보면 좋겠다.
작지만,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것들, 그 소소하고 확실한 것들이 어쩌면 지금도 당신의 하루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