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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정한 식탁의 면면함에 관하여.

면면함: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있는 상태

by 채움
<월요일엔 역시 힘이 나는 호빵맨 김밥>



얼마 전 영상을 보다가 '밥 먹는 자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식탁은 소속감과 사랑을 배워야 하는 자리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문득 우리 부부의 식사 룰이 떠올랐다.

둘 이상 함께 식사할 땐 핸드폰을 멀리 하자는 약속.

남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래야 하는지, 핸드폰을 안 보면 뭘 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식사 예절, 집중력, 대화의 중요성 등을 조목조목 설명하고는 "함께하는 시간, 그 자체가 필요하다"라고 언급하였다.


결혼을 하면서 이 작은 집 안에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건 식탁이었다.

하루 중 마주 앉는 시간이 가장 많은 자리, 매일 한 번쯤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내어놓는 시간.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는 결국 부엌과 식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안온하게 만들기 위해선 조리법보다 태도가 먼저여야만 했다. 그리고 거기에 다정함 한 스푼까지 더해진다면, 차가운 세상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라 믿었다.


엄마의 식탁이 떠올랐다.

엄마의 식탁이라면,

분명 다정함을 배울 수 있으리라.






#1.

어릴 적 우리 집 아침은 갓 지은 밥내음과 나무 도마 위 칼질 소리로 시작되었다.

아빠는 새벽 수영을 다녀온 후 출근을 하셨고, 우리 가족의 하루도 그만큼 일찍 시작됐다. 그 시간마다 부엌은 분주했고, 엄마는 늘 그 중심에 있었다.


지금이야 아침 대용식도 잘 나오고 로켓 배송 찬스도 있어 식탁을 차리기가 한결 수월하지만, 당시에는 한 끼 식사를 차리기 위해 동네 상가를 도장 깨듯 돌며 장을 보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이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으셨는지 굴다리 시장과 건넛마을 장터까지 발을 옮기며 제철 재료들을 직접 공수해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사냥에 성공한 고양이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들어오셨다.


엄마의 손길이 닿은 식탁은 매 끼니 새로웠다.

밥과 국, 제철 나물, 고기반찬..

크지 않은 상 위에 올려진 접시 위로 그날의 노력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밥상이었다.


그리고 차려진 식탁만큼이나 눈이 머물던 장면은 아침을 여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 시간 동안 엄마는 빛이 스며들어 반짝이는 식탁처럼 생동하고 있었다.




#2.

아빠가 새벽 수영에서 돌아오시는 시간과 맞물려 남매는 학교 갈 준비를 끝낸다.

아침 준비 다 됐으니 빨리 나오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 앉으면, 열에 여덟은 수저만 덩그러니 놓인 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늘 가족 모두가 자리에 앉은 뒤에야 음식을 내놓으셨다.


갓 지은 밥에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메인 반찬들,

마지막까지 끓고 끓어서 국물이 자박해진 찌개까지.

모든 음식은 뜨끈한 채로, 타이밍을 맞춰 식탁에 올랐다.


엄마는 혹시 식사 순서를 전략적으로 계획한 걸까?

하지만 곰곰이 떠올려보면 그보다 더 단순했을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싶으셨던 마음. 그 마음은 말 대신 음식의 온기로 전해졌다.




#3.

드라마처럼 왁자지껄한 식사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분하고 담백했다. 하지만 난 그 일상과 분위기가 좋았다.


중간중간 음식이 먹을만하냐고 물어보는 엄마와,

찌개가 맛있다고 밥 한 공기 더를 요청하는 아빠.

국만 있으면 한 그릇 뚝딱인 동생.

먹을만하냐고? 먹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 맛있어!라고 엄마의 질문을 정정하는 나의 모습까지.


그렇게 주고받는 말들이 모여 한 끼의 밥상이 되었다.

아빠는 식사 중에 다음 주 회사 일정을 이야기했고, 나와 동생은 전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종알거렸다.

전업주부의 단조로운 일상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걸까. 우리가 없는 시간, 그녀가 늘어진 그림자처럼 변하게 될까 봐 아침 식사 시간에는 꼭 이야기보따리를 한 움큼씩 풀어놓곤 했었다.






다행히 결혼을 하고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나는 아침 식사를 차리기 위해 애썼다.

물론 엄마처럼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같이 부엌에 나설 수는 없다.

입덧으로 한동안 부엌 근처도 못 갔고, 전날 너무 많이 먹어서 부대낀다거나 잠을 더 자고 싶다 등의 이유를 대는 오빠의 '센스' 덕분에 은근슬쩍 넘어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엄마의 ‘다정한 식탁’을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중이다.


외출 후, 집으로 오는 길이면 동네 마트나 시장을 기웃거리며 재료를 찾아보고, 아침 준비를 할 때면 찌개나 국은 차례를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번에 올려진다.


혼밥 하던 시간이 길었던 부부는 한 번에 휴대폰을 끊지는 못했지만, 그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리는 식사 내내 요리할 때 듣던 재즈를 배경 삼아, 카페에 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하루와 마음을 풀어낸다.

남편의 학교 일상, 동네 업데이트 소식, 경제와 최근 관심사,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 등.

어떤 날은 서로 시답잖은 농담과 상황극으로 깔깔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무거운 공기가 부엌을 짓눌러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순간들이 좋다.

적당히 조용하고, 가끔은 웃음도 터지고,

아무 말 없이 식사만 하는 날도 괜찮다.

그런 식탁을 우리는 천천히 빚어가고 있다.


엄마의 식탁처럼 풍성하진 않지만, 그 마음은 닮고 싶다.

매일을 지켜내는 부엌과 사랑을 담아낸 식사.

그 다정함이 나의 식탁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길 바란다.



앞으로도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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