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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국수를 먹으며 생각하였소.

: 들기름 막국수, 함께 먹고 함께 걷는 날

by 채움



평일 아침은 아이와 남편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같은 식탁에 앉아도 메뉴는 늘 따로이다.

아기는 이유식, 남편은 따로 차린 한 그릇, 나는 헤이즐넛 시럽을 잔뜩 넣은 커피와 빵(혹은 과자).


'동상이식(同床異食)'

같은 식탁에서 다른 밥을 먹는다.

이건 마치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다.




#1.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최근 먹테기가 와서 밥을 안 먹는 아이를 위해 특식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메뉴는 '들기름 막국수'

메밀과 들기름은 이미 테스트를 통과한 지 오래라, 계획을 미룰 것도 없었다.


어른 그릇에는 잘게 썬 오이채, 고소한 깨소금을 솔솔 뿌리고, 아이의 작은 곰돌이 그릇에도 같은 국수를 담았다. 간은 하지 않았지만, 김가루와 깨를 얹으니 제법 근사한 아기용 막국수가 되었다.


- 와 오늘 메뉴 뭐야? 셋 다 같은 거 먹는 거야?

- 오늘은 특식이야! 잘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국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댔다. 옆에서 슬슬 눈치를 살피던 우리도 젓가락을 드는 시늉을 했다. 아이는 면을 유심히 살펴보다 몇 번 입에 갖다 대더니, 식탁을 탕탕 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맛있다는 신호였다.


국수는 슴슴했다.

간은 거의 하지 않았고, 들기름만 살쩍 둘렀을 뿐인데, 김가루와 깨, 그 위에 얹은 양념장이 입안에 은근한 감칠맛을 남겼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질리지 않는 맛이라 더 좋았다.


- 우리 드디어 같이 먹네!


이날 아이는 처음으로 숟가락을 들고 자기 주도식을 했다. 막국수로 식판은 물론 바닥까지 난장을 쳤고, 머리와 옷, 의자 사이사이에 떨어진 메밀국수가 반이었다.


그런데도 땅바닥에 떨어진 메밀면을 주우며 실실 웃음이 났다. 이유식으로 시작한 아기의 식사가, 드디어 우리 식탁 위로 걸어온 것 같았다.

아이는 지금 분명히 '함께 먹는 맛'을 배우고 있었다.

이렇게 잘 먹어준다면야, 얼마든지 닦을 수 있지 뭐.

암 그렇고 말고.




#2.



막국수를 후루룩 넘기며 웃던 그다음 날,

아이는 처음으로 신발을 신고 스스로 걸었다.


그동안 맨발로 쏘다니기만 하던 아이는 양말과 신발을 신기면 얼음이 되어 오열했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이것도 뒤집기처럼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야겠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이는 조용히 해냈다.


작은 발로 바닥을 꾹꾹 누르며 뚱땅거리며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기 삶을 향해 걸어가겠지. 그때가 오면 잘 보내줘야 할 텐데.'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면서.

거북이보다도 더 느릿한 걸음을 걷다가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달리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내 젓가락을 잠시 내려두고 아이를 지켜볼 수 있을까.


한 그릇의 밥,

한 그릇의 국수,

그리고 아이의 한 걸음.


작은 시작들이 모여, 히수무레하고 부드러운, 고담하고 소박한 하루를 빚어낸다.

슴슴하지만 감칠맛 나는 들기름 막국수처럼, 우리 식탁도 처음으로 같은 맛을 품었다.



<들기름 막국수>
*재료 손질
- 오이 : 씻은 후 채썰기.
- 조미김 : 잘게 부숴주기.
- 참깨 : 간 깨소금과 통 깨소금 준비하기.

*들기름 막국수 만들기
- 메밀면을 4~5분 삶고, 찬물에 헹궈준다.
- 양념장(쯔유1, 진간장1, 들기름3~4, 알룰로스1)을 넣고 섞어준다.
- 갈았던 깨소금과 조미김을 넣어 함께 섞은 후, 플레이팅시 오이 위에 통깨를 뿌려준다.



*참고: 백석 <국수>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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