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부모님이 오시는 날은 아침부터 발이 동동 뜬다. 언제쯤 오시려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부모님이 올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발걸음은 자꾸 세탁실 창문으로 향한다. 아파트 단지로 차가 한 대씩 들어올 때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다.
그럴 때면 황동규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오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그리움이 창문 틈으로 먼저 도착해 있는 그런 날이다.
"can’t take my eyes off you(Frankie Valli)" 노래를 틀어놓고 아이와 남편과 춤을 추며 놀다가, 초인종 벨소리에 후다닥 뛰어나갔다.
양손 가득 장을 봐오신 엄마, 아빠의 모습은 언제 봐도 든든하다.
매번 "어휴, 그냥 오세요!" 말해도, 낯선 동네에서 육아하는 내가 안쓰러워서인지, 뭔가라도 들고 오셔야 마음이 편하신 건지, 항상 손이 미어지도록 챙겨 오신다.
이번에 가져오신 건, 머리통만 한 수박,
그리고 엄마표 여름 김치.
열무김치, 오이소박이, 오이피클, 생깻잎 김치까지.
냉장고 문을 여니 그 안으로 여름이 통째 들아왔다.
어릴 적, 여름이면 엄마표 열무김치로 냉면이나 비빔밥을 해 먹곤 했다.
살얼음이 동동 뜬 냉면 육수에 시원 칼칼한 열무김치와 달달한 수박 몇 조각을 넣어 먹으면 으슬으슬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더워서 입맛이 없는 날에는 고추장 한 숟갈, 참기름 몇 방울, 그리고 열무김치 몇 가닥이면 충분했다.
김치를 담글 줄 알면 진짜 독립이라는데 나는 아직도 엄마표 김치 선물을 기다리고 있으니, 진정한 독립까지는 한참 멀은 것 같다.
오늘은 엄마가 담가주신 열무김치에 밥을 슥슥 비벼 먹었다. 열무김치가 입 안에 들어오는 순간, 잊고 지내던 우리 집 여름의 맛이 되살아났다.
엄마와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비벼 먹던 풍경도 함께 따라왔다.
엄마의 음식은, 독박육아 중에도 어찌 되었든 한 끼를 챙겨 먹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그 속에는 단지 채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과 사랑, 그리고 뜨거운 이 계절이 함께 담겨 있다.
이제는 돌봄을 받는 자리에서 돌보는 자리로 위치가 살짝 바뀌었지만,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김치를 만들며 부모님으로부터 진짜 독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열무김치 한 통을 챙겨 보내는 여름날도 올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되어가는 거겠지.
여름을 보내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