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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김밥 한 줄로 배우는 사랑의 기술

by 채움



#1.

지인의 결혼식으로 오랜만에 설레는 주말을 맞이했다.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러 가는 길. 그 길에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을지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데리고 가자.


세 가족의 공식적인 첫 행사였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원피스를 입힌 후, 우리는 작은 긴장과 두근거림을 안고 집을 나섰다.


웨딩홀은 마치 꽃밭 같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하얀 호접란과 연분홍색 수국, 탐스럽게 피어난 장미들이 시선을 끌었다. 천장에는 작은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살랑거리고 있었다. 어두운 공간이 생명력으로 가득 찬 순간이었다.

아이는 대롱대롱 매달린 꽃 몽우리가 작은 종처럼 흔들리는 것이 신기했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막 피어난 꽃잎에서 퍼져 나오는 달짝지근한 생화 향, 눈앞에 펼쳐진 그 싱그러운 풍경에 마음이 함뿍 젖어들어 우리는 육아로 지쳐있던 일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신부의 입장과 성혼문 낭독을 보며 우리 부부는 약 2년 전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 아, 결혼식 또 하고 싶다

- 결혼을 두 번 하겠다는 소리야?

- 아니, 그게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다시 입고 싶다는 거야. 그때 그냥 슬림 드레스 입을걸.

- 십 년 후에 리마인드 웨딩 하기로 했잖아. 이제 8년 남았어, 참아봐ㅋㅋㅋㅋㅋ

- 그때는 셋이 같이 찍자, 꼭 제주도 가서 찍어야지.


나는 조명에 반짝이는 웨딩드레스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의 손을 꼭 쥐며 남편에게 속삭였다.


남의 결혼식을 보면서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다니. 육아로 지쳐있던 날들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우리의 추억에 오랜만에 미소가 지어졌다.




#2.

다음날 아침, 조용한 주방에서 김밥 재료를 하나씩 꺼내며 천천히 하루를 시작했다.

메인 메뉴는 차돌박이. 익숙한 햄 대신, 고기를 꺼내 프라이팬 위에 올렸다. 치이-익,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김밥의 속재료로 쓰일 단무지와 김치, 우엉은 먹기 좋게 썰어 접시에 놓았다. 하나씩 재료를 올리고 말다 보니 어느새 부엌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그 와중에 남편은 학교 갈 준비를 하며 김밥을 하나씩 집어먹고, 아이는 두 사람의 다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걸음마 연습을 했다.

작은 발걸음이 부엌 바닥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집 안에 잔잔한 웃음이 연못에 핀 수련잎처럼 퍼졌다.


김밥 꼬다리를 입에 넣으며, 어제 지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2,30대를 함께 보내온 나의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 척척 잘 해내는 모습이 너무 멋있고 기특하다는 말.

- 결혼 축하영상에서 남편이 했던 인터뷰.

지금 걷는 이 길이 앞으로의 결혼 생활 중 가장 덜 행복한 날일 거예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떠올리자, 우리의 결혼 생활이 그랬나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잠깐, 우리의 결혼은 어땠지?




#3.

신혼여행을 가서 함께 본 제주 오름의 풍경. 이럴 줄 알았으면 눈에 많이 담아 둘걸.


결혼.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하고, 다르게 생긴 것들을 한 줄로 말아내는 일.


이 지구상에서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도 하늘에 별따기인데,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어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말지 않으면 흩어져버릴 것 같은 재료들을 꾹꾹 눌러 한 줄로 만드는 김밥처럼, 사랑도 때로는 돌돌 마는 과정이 필요하다.


연애 초반의 강렬한 감정이 결혼 생활 끝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차돌박이'처럼 임팩트 있는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함께하는 일상에서는 단무지도, 김치도, 미나리도 필요하다.

기름진 고기만 먹으면 질리는 것처럼, 우리의 결혼 생활에도 감정의 균형이 필요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를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느끼는 부분이다.


마냥 행복할 줄 알았던 우리의 결혼 생활도 진흙탕을 뒹굴던 때가 있었다.

육아 초반, 백일까지는 체력적으로 힘이 드니 서로 배려했지만, 그 후로는 작은 서운함이 쌓이고 쌓여 눈덩이처럼 커졌다.


왜 나만 참아야 되지?

왜 내가 더 많이 해야 되지?

나는 체력이 뭐 남아 돌아서 이걸 하고 있는 건가?

몸이 힘드니 마음도 예민해져 서로가 각자의 상황만 보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결혼 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그 와중에도 감사했던 것은, 아이가 그 소란 속에서도 곤히 잠들었다는 것이었다.

전쟁 같은 싸움이 끝난 후, 우리는 눈 녹은 진창처럼 망가져 나는 거실 소파에, 남편은 작은방으로 들어가 화를 삭였다.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게 이렇게까지 핏대를 세우며 싸울 일인가 싶었고,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보자 괜히 더 미안해졌다.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것은 절대 하지 말자던 약속은 힘든 육아 앞에서는 무색한 일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채 5분도 안 돼서 서로를 끌어안고 펑펑 울며 화해를 했다.




#4.

결국 우리는 다시 이 자리, 마주 보고, 김밥을 말고, 사랑을 다시 배운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날은 지나갔다. 말이 엇갈리고, 마음이 다치기도 했지만, 우리는 다시 부엌 앞에 나란히 섰다.


이제는 김밥을 말면서 언제 차돌박이를 얹고, 어떤 타이밍에 재료를 더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가끔은 속재료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제대로 말리지 않기도 하지만, 튀어나온 곳은 눌러주고, 터진 곳은 다시 감싸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말고 있는 이 김밥은, 그 지난한 시간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운해하고, 싸우고, 다시 화해하며 서로의 재료를 이해해 간다.


사랑은 우리가 늘 잘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늘 마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차돌박이를 새콤한 단무지와, 아삭거리는 미나리로 감싸는 법. 그리고 입안 가득 어우러지는 맛을 위해 조금씩 한 줄 한 줄 말아 쌓아 올리는 정성이 필요하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한 줄의 사랑.

그것이 결혼이라는 이름의 진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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