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다

by 정상환

이처럼 다양한 쓰임새도 드물 겁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의 수면 유도제로, 때늦은 식사를 위한 냄비 받침대로, 벽지 색깔에 맞춘 인테리어 소품으로, 혹은 지적 이미지 연출 소품으로. 그리고 극히 일시적 용도지만 구타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는 것.

바로 책입니다.

책의 용도가 개인마다 다를지라도, 그 바탕은 세상을 향한 지적인 '갈구'에서 비롯될 겁니다.

세상살이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한 것, 그것이 책에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람이 서늘합니다.

새삼 마음을 다잡고 책을 펼칠 궁리를 해보지만, 스며든 게으름을 떨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활자 대신 '숏폼'의 압축된 쾌감에 중독되었고, 생각 대신 '핵심 짤' 몇 장으로 복잡한 논리를 이해하려는 시각적 의존성에 길들여진 탓입니다.


유튜브 영상이 세상을 보는 창이 되었고, 수많은 '밈(Meme)'이 논쟁의 결론을 대신하는 시대입니다.

깊은 호흡의 '독파(讀破)'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초단기 집중력'의 얄팍함이 스며든 것입니다.

순수한 읽는 즐거움보다는 '검색(檢索)'과 '실용성'만을 앞세운 가벼운 지식 소비에 갇혀버린 셈입니다.


이럴 때면 두 분의 지성인이 떠오릅니다.


H 선생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분입니다.

짬만 나면 책을 읽는 다독가(多讀家)입니다.

60대 후반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법조계 명망가로 책을 써도 몇 권을 쓸 정도로 해박하지만, 법학 관련 서적부터 잡문에 이르기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피곤에 지친 해외 출장길에서도 두툼한 영문서적을 돋보기에 의지하여 틈만 나면 펼칩니다.

"어찌 그리 책을 좋아하십니까?"하고 여쭈면 "습관이지요 뭐…"라고 그냥 미소 지을 뿐입니다.


오래전 이 분에게 저의 잡글을 담은 졸저를 부끄럼을 무릅쓰고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보잘것없는 이 졸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다 읽은 몇 안 되는 분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사실 지인의 저서를 건네받고 완독 한다는 것은 내 경우, 웬만한 성의로는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저자에 대한 예의와 책에 녹아있는 경험 그리고 가치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백발이지만 '포스'가 느껴지는 이유일 겁니다. 다독(多讀)의 힘이겠죠.


S 선생의 경우는 낭만파 독서가입니다.

언론인 출신으로 고위관직을 역임하셨죠.

은퇴 후 새로운 돈벌이에 나서지 않겠다 선언(?)하고 지금은 북한강변에서 농사를 지으며 야생화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평소 말씀은 간결하고 깔끔하지만, 소주 한잔 앞에 두면 서양 문화사부터 인사동 뒷골목의 유래까지, 그분의 말씀을 듣노라면 막차 시간을 훌쩍 넘기는 수가 많습니다.


이 분의 지적 해박함과 세상을 보는 혜안은 책 읽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소위 필 받으면 특정 분야의 책 읽기에 한 동안 집중합니다. 한 때 경제·역사분야에 몰두하여 대학 전공자들도 완독을 포기하는 원서를 독파한 적도 있다 합니다.

언젠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끝까지 다 읽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나신 분들은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지만 현실과 접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분들은 바쁜 일상 때문에 한가롭게 책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럴 경우 저의 알량한 요령(?)에 비추어 '서가산책'으로 대신합니다.

즉 가까운 '서점가기'죠.

'술을 가까이하면 술 냄새가 나고 책을 가까이하면 책 향기가 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나 할까요?


도서관의 엄숙함보다는 자유롭고, 가벼워서 좋습니다.

책 숲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느낌,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막 출간 된 책들의 파닥 거림이 좋습니다.


깔려있는 책 제목만 보더라도 현재의 사회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자 약력과 서문 그리고 에필로그만 슬쩍 들추어 보더라도 마치 한 권을 다 읽은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낍니다. 완독, 정독의 기쁨은 누리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검색(檢索)'과 '숏폼'의 시대에 걸맞지 않나요?

이것이야말로 '초단기 집중력' 시대에 '정보와 지식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타협이자 독서법이라 생각합니다.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원천은 인쇄공이었던 할아버지가 모아두었던 200여 권의 고전 서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손자 에코는 이 책들을 독파하며 최고의 지성이 되었습니다.


비록 수면 유도제일지라도, 냄비 받침일지라도, 이미지용 소품일지라도 좋은 책을 가까이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는 기쁨을 지금은 누리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나의 손자, 혹은 다음 세대가 이 책을 통해 짤, 밈등의 숏폼과 쏟아지는 영상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지성의 깊이에 닿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짧은 영상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우리지만,

잠시 멈춰 책 향기를 맡고, 한 문장을 곱씹는 시간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디지털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느리지만 단단한 세계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숨을 고를 수 있겠죠.


책은 이렇게, 여전히 우리를 기다립니다.


이 가을, 책 숲을 걸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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