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기대어, 오늘을 건넌다

by 정상환


70년대 즈음, 어린이용 자전거는 드물었다.

아이들도 어른들이 타던 크고 무거운 철제 자전거를 탔다

안장에 오르면 발이 닿지 않아 프레임 안으로 다리를 넣어 x자 타기,

서서 페달 구르기 등 나름대로의 기술을 발휘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두 다리로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했으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아버지는 어린이용 빨간 자전거를 사주셨다.

어른 자전거를 축소해 놓은 듯한 그 자전거는 동네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부러운 눈길을 느끼며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폼나게 달렸다.
논밭을 지나 둑 위로 올라 저수지에 드리운 노을을 바라보던 그때의 고적함과 신선한 바람은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키가 한 뼘 더 큰 중학시절, 여름방학 때면 시골 외가댁에 가 지냈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할머니께서는 나를 앞장세우고 10여 리 떨어진 장에 가셨다.

비포장길, 나는 자전거를 타고 느린 할머니 걸음에 맞추어 몇 번이고 앞서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방앗간에 들려 기름도 짜고, 눈깔사탕도 사고, 생필품과 몇 가지 반찬거리를 사면 장바구니는 묵직해졌다. 장바구니를 자전거에 싣고, 다리에 힘을 주어 페달을 밟다 보면 날리는 흙먼지와 땀이 범벅되었다.

고갯길에서 호흡이 가빠지면, 외할머니께서는 길옆 과수원에 들러 복숭아와 자두, 수박을 사주셨다. 샘물에 담가 놓은 수박의 맛은 냉장고 이상 시원했고, 설탕보다 달콤했다.

그리고 때마침 불어주는 한 줄기 바람.


키가 두세 뼘 더 커진 고교시절, 막 기어 자전거가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스마트한 자전거 한 대를 사, 난 자전거로 등하교하였다.

사실 자전거 통학의 편리함도 있었지만, 등하교 길 여고 앞을 멋지게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고 자전거 위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정면을 응시하며 질주(?)했다. 여고생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우쭐해했다.

여느 날과 같이 하교 길에 여고 앞을 지나던 어느 날.

아뿔싸! 자전거 뒤에 묶어 놨던 책가방이 떨어지며 양은 도시락이 분리(?)되어 길바닥에 뒹굴었다. 숱한 여학생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꽂혔다. 흩어진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 김치 국물이 뚝뚝 떨어지던 김치 병. 황급히 교문 앞에서 집어 들으며 얼마나 창피했던지...

그 후 난 다소 시간이 걸려도 그 여고를 우회(?)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아버지는 세 살 나의 딸에게 예쁜 세발자전거를 사주셨다.

집 앞 공터에서 세발자전거를 끌어주고 밀어주며, 할아버지는 손녀의 힘겹지만 스스로 나아가려는 페달링(?)에 기뻐하셨다. 아마 세상을 힘차게 질주하길 바라는 바람이셨을 것이다.


나의 딸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예쁜 두 발 자전거를 선사했다.

두 발 자전거 타기는 어린 딸에게 며칠의 연습이 필요했다. 뒤에서 붙잡아주었지만 비틀거리고 넘어지기는 계속됐다. 그러나 홀로서기(?)에 성공하며 나의 손끝을 벗어날 때의 경련과 짜릿함은 지금도 기억해 낼 수 있다. 자세를 곧게 하고 앞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는 자신감에 아빠로서 안도의 기쁨이었다.

이젠 뒤를 붙잡아주기보다는 달려가는 뒷모습을 향해 응원만이 필요하다는 괜한 섭섭함이었을 수도 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진정한 라이더(?)라기보다는 청춘인 양 스파이더맨(?) 복장과 유유자적을 즐긴다.

휴일이면 동생과 함께 한강 하트코스, 북한강 자전거길, 남한강 자전거길 등등 내 두 발로 멀리까지 다닌다.


이 자전거라는 것은 자신의 힘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르막에서 페달을 멈추면 쓰러진다. 힘껏 저어야 한다.

내리막에서는 적절히 브레이크를 쥐어야 한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꼭 달려간 만큼,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빨간 어린이 자전거, 덕고개의 여름, 떨어진 도시락, 그리고 혼자 달려 나가던 딸아이의 뒷모습.

바람에 기대어 건너온 시간이다.


아마 우리 삶도 비슷하리라.

누군가 붙잡아주고 밀어주던 시기가 지나면, 결국은 스스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때로는 힘겨운 오르막도, 때로는 내리막의 속도도 삶의 일부다.
넘어지더라도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가을, 자전거 타기 좋은 계절입니다.
한강 하트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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