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이름을 듣는 건 왜 어려울까
내가 한글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코 "이름"이다. "태섭"이 두 글자 한글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얼마나 좋으면 응급실 같이 아무리 시끄러운 공간에서도 "태섭" 소리가 들리면 쳐다보게 된다. 그냥 인사하는 것보다 "안녕하세요 태섭쌤"이 더 반갑다. "이름이 뭐였지? 태섭이 맞나?"라며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내 이름을 기억하면 고맙다. 슬램덩크 "송태섭"처럼 이름이 같은 사람을 보면 눈길이 한 번 더 간다. 혹시 내 이름이 남들보다 매력적인 걸까?
응급실에서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처음 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들을 구별해 주는 건 오로지 "이름"이다. 이름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 누군가를 특별하게 만든다. 상대방의 이름을 알게 되면 내가 전하는 정보나 요청하는 내용이 그냥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그래서 환자들의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환자들의 이름은 전산상이나, 병원 팔찌 그리고 직접 들어서 알게 된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이름을 몇 번이나 들어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며 물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약 줄 때, 검사할 때, 증상 물어볼 때 등 환자를 마주칠 때마다 계속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까 물어봤는데 왜 또 물어봐! 이름도 하나 기억 못 하면서 날 어떻게 치료해!"라고 화내는 사람도 있다. 워워 진정하세요. 당신의 이름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랍니다. 계속 확인하지 않으면 다른 환자에게 처치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요. 결국 이름을 여러 번 물어보는 건 환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가끔씩은 딱 한 번만! 이름을 물어보고 싶은 환자도 있다. 그분들의 이름을 말하고 들을 때 자꾸 미소가 나오기 때문이다. 병원이라 항상 정숙하고 싶은데 입은 크게 미소를 짓게 된다. 미소를 짓게 만든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인 이름이라는 거다. 내 이름보다도 훨씬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그분들을 소개한다.
1. 김시박 님
환자가 아프다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너무 아프다고 빨리 해달라고 했다. 환자 팔찌를 들고 왔지만 손에 꽉 쥐고 있어서 이름 확인을 못했다. 그래서 직접 보고 물어봤다.
"환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시박"
"네? 뭐라고요?"
"시박"
"아니 아무리 급해도 갑자기 욕을 하시면 어떡해요?"
"시박이라고! 김시박!"
"네? 팔찌 볼게요. 아 맞네요. 하하 아 죄송합니다"
옛 어르신들은 이름을 지을때 장수하라는 생각으로 욕처럼 강하게 지었다고 한다. 어르신 이름이 오래오래 건강하실 만큼 충분히 강하고 매력적이십니다!
2. 이재벌 님
머리를 엄청 아파하셨다. 극심한 두통에 미간은 좁혀지고, 인상은 굳어졌다. 두 손은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팔찌에 있는 이름을 보니 평소 좋은 기운이 한가득 들어오셨을 것 같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재벌입니다"
"환자 분 이름에 기운이 참 좋으시네요"
"아네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인상을 팍 쓰고 계셨는데 미소를 활짝 지었다. 머리를 감싸던 두 손을 내렸다. 인상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다 나았다. 나도 덩달아 크게 미소 지었다. 역시 재벌은 아파도 여유가 넘친다.
3. 심간난 님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에 난간이 내려져 있으면 정말 위험하다. 낙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에게 낙상은 죽음까지도 갈 수 있는 초 응급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침대 난간이 내려져있으면 우사인볼트처럼 후다닥 뛰어가서 올린다.
"환자분 여기 난간 좀 올릴게요!"
"간난이라고"
"네? 잠깐 옆으로 가주세요. 여기 난간 좀 올릴게요!"
"간난이라니까!"
"아니 여기 난간이요!! 잠깐 옆으로 가셔요. 위험해요!"
"간난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
"네? 아 죄송합니다. 간난님.. 난간 좀 올리겠습니다."
안전하게 침대난간을 올린 후 내 자리로 돌아갔다. 간난님이 낙상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아직도 나는 침대난간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짓는다.
4. 이애기 님
천사 같은 애기들이 아프면 응급실에 온다. 그 애기들을 볼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나는 더 크게 미소 지으며 애기들한테 인사한다. 어느 날 80대 노인이 아프다며 응급실에 왔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애기"
"네^^ 이애기님. 오늘은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나는 이 어르신 앞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5. 이폐기 님
CT를 찍어야 하는 환자는 촬영하기 전에 동의서를 받는다. 성함을 여쭤봤는데 폐기라고 했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폐기하라니 진짜 너무하잖아.
"이폐기님 이건 CT 찍으신다는 동의서고요. 여기에 본인 성함 적어주시면 됩니다"
"서명란 : 이 태 희"
아 빨리 듣다 보니 헷갈렸습니다. '이태희' 님이시네요. 제가 오해했습니다. 나 혼자 태희 님의 서명을 받으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응급실은 전쟁터 같이 분주하고, 시끄러운 공간이다. 여기저기서 아프다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바쁘게 일하고 있으면 미소 지을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매력적인 그분들의 이름 덕분에 한 번씩 미소를 짓게 된다. 응급실에 왔다 가신지 몇 달이 지나도 이름과 얼굴은 내 기억 속에 남았다. 다시 한번 뵙고 싶지만, 이제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셔서 응급실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름이 매력적인 만큼 장수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