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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달의 가루

소설연재

by 태섭
아무리 힘든 듀티에도 인계 시간은 찾아왔다. 하주는 인계를 끝내고 병원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툭” 하고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바람으로 털어내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떼어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맑았다. 달의 가루가 흩뿌려진 듯,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서울에서 이럴 수가 없는데,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모를 점들이 공중에서 숨 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걸 보는 동안 어깨 위의 무언가가 조금 옅어졌다.

하주가 직원 식당을 나섰다. 응급실로 돌아가는 길. 어느새 하주의 어깨 위에는 이재혁 교수의 팔이 올라가 있었다. 말은 차가웠지만, 그 팔의 온기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띡—소리와 함께, 응급의학과 연구 준비실의 문이 열렸다. 재혁은 하주의 등을 한 번 치고 혼자서 걸어 들어갔다. 힘내라는 의미일까, 이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하주도 간호사 휴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안에 넣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습관. 어차피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다른 생각을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일단 해봐야 안데이'


하주는 그 생각을 조금 더 오래 하고 싶었다. 야속하게도 남은 시간이 짧았다. 응급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하주가 자리로 돌아갔다. 앉을 새도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는 응급 처치를 위해 물품을 준비했다. 처치실 문을 닫아도, 스테이션에서 멀리 떨어져도, 선배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냥 혼자만의 착각일까? 아, 거짓말처럼 신경 안 쓰이면 좋겠다. 그나마 재혁과 했던 말 덕분에 그의 숨통이 약간은 트였다.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고, 딱 무너지지 않을 만큼.


아무리 힘든 듀티에도 인계 시간은 찾아왔다. 하주는 인계를 끝내고 병원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툭” 하고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바람으로 털어내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떼어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맑았다. 달의 가루가 흩뿌려진 듯,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서울에서 이럴 수가 없는데.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모를 점들이 공중에서 숨 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걸 보는 동안 어깨 위의 무언가가 조금 옅어졌다.


덕분에 하주의 발걸음이 공유 자전거로 향했다. 여름밤은 빛과 소리와 냄새로 풍경을 만든다. 자전거에 올라 하천길로 내려가자, 바퀴가 아스팔트에 아직까지 남은 낮의 열기를 끌어안고 굴러갔다. 스쳐 지나가는 풀숲에는 개구리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듯 개골개골 울었다. 물가 근처에선 미세하게 흙냄새가 퍼졌다. 가로등 아래로 날파리 무리가 어지럽게 떠다니며 그의 커다란 눈앞을 스쳤다. 그 작은 것들이 번갈아 시야를 점거해도, 힘차게 페달을 한 번 더 밟으면 바람이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 바람은 어깨 위의 무언가까지 통째로 밀어 사라지게 했다. 드디어 하주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가벼워진 몸으로 밤길을 달렸다.


'그래. 도망치지 말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자 띠리링 하고 세련된 소리가 났다. 정적이 방 안 가득 퍼져 있었다. 새로 도배한 벽의 풀 냄새, 새 가구에서 나는 약한 접착제 냄새, 아직 집에 적응하지 못한 공기의 낯섦이 스쳤다. 그가 꿈꿨던 내 집이지만, 이 안온함의 대가를 매달 치러야 한다는 현실이 함께 따라왔다. 하주는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다가, 무심코 휴대폰 금융 앱을 열었다. 화면 속 선명하게 찍힌 대출 잔액과 다음 달 상환 예정 금액. 그 숫자들은 자석처럼 하주의 눈에 달라붙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를 현재로, 아니 더 깊은 현실로 끌어당겼다.


퇴사를 위해 집을 샀지만, 오히려 퇴사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더 열심히 해야지.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다짐을 붙잡는 순간, 잊었던 목소리들이 되살아났다. 자전거 바람에 겨우 털어냈다고 믿었던 선배들의 수군거림이, 굳게 닫힌 현관문을 비웃듯 스며들어왔다. 겨우 떨쳐냈는데. 집은 안전지대여야 하는데.


하주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옷을 홀라당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길게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물기 때문인지, 눈동자가 의외로 맑았다. 문득 스스로에게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하주야, 너 계속 일할 수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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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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