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지령을 받으며 움직인 하루, ‘예스폭진지’ 투어
[호]
가오슝에서 한 달 살기를 마치고 타이페이로 이동해 하루를 쉰 뒤,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은 김에 시간 절약도 할 겸,
한국에서 관광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1일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습니다.
(1인당 35,000원, 식사비는 별도.)
이른바 ‘예스폭진지’라 불리는, 타이페이 근교의 유명 관광지를
하루에 몰아서 다녀오는 코스입니다.
예류지질공원을 시작으로
천등을 날리는 스펀 지역과 인근 폭포,
금광이 있던 진과스,
그리고 야경으로 유명한 지우펀까지.
큰 기대라기보다는,
'이동과 동선 걱정 없이 하루를 실속있게 써보자'는 선택이었습니다.
아침 9시 30분까지 타이페이 중앙역 M5 출구 지하에 도착했습니다.
순식간에 한국 관광객들 70~80명이 모였네요.
오늘 하루 ‘예스폭진지’ 투어를 오는 한국인만 1,2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 버스에는 교회 단체로 온, 수능을 막 끝낸 고3 수험생 17명도 함께 탑니다.
어디를 가든 한국어가 가장 많이 들릴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인원 점검을 마치고 대형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타서
타이완 최북단, 예류지질공원으로 향합니다. 이동 시간은 약 한 시간.
2019년 프라하 한 달 살기 중 한국어 가이드 투어를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딱 맞는 투어가 시작됐습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가이드는 숨 돌릴 틈 없이 안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열었습니다.
버스에 탄 39명의 투어 참가자들이 모두 들어온 단체 채팅방입니다.
예전 같으면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했을 텐데,
지금은 말로 설명을 하면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움직여
채팅방에 필요한 정보를 계속 올립니다.
관광 후 다시 모일 시간, 버스 위치, 심지어 주차된 버스 사진까지
실시간으로 공유되네요.
말로만 듣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채팅으로 ‘지령’을 받다 보니
신속하고 정확한 대신 따라가기가 꽤 바쁩니다.
편리하지만, 정신은 없네요.ㅎㅎ
예류지질공원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든 깃발을 따라 일제히 이동합니다.
낙타바위, 공주머리 바위, 하트바위...
그럴듯한 이름들이 붙어 있지만
'그런 듯, 아닌 듯'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바위들도 많군요.
사진을 찍고, 설명을 듣고, 다시 모이고, 이동하고.
관광이라기보다는 마치 잘 짜인 동선을 따라 움직이듯, 착착착 이어집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스펀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천등을 날리는 곳입니다.
여기서도 어리버리할 틈은 없습니다.^^
천등을 사고, 네 면에 각자 소원을 쓰고, 사진을 찍고, 하늘로 날리는 모든 과정이
가이드가 채팅으로 알려준 순서대로 정확히 진행됩니다.
관광객들 모두 가슴에 품은 사연과 소망들을 열심히 천등에 새깁니다.
스펀 마을 한가운데로 기차가 들어옵니다.
원래는 석탄과 물자를 나르던 산업 철도인데 광산 마을의 생활 공간과 철도가
분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스펀을 지나는 기차는 관광용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실제로 타는,
‘핑시선(平溪線)’여객 열차라고 합니다.
기차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천등을 들고 있던 관광객들이 철길 양옆으로 물러서고,
기차가 지나가면 다시 철길 위가 사람들로 채워집니다.
위험해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래된 일상입니다.
근처의 스펀 폭포를 잠깐 둘러보고 또다시 버스로 이동합니다.
예전에 금광이 있던 진과스에 도착해 주변 풍경을 잠시 둘러본 뒤,
‘광부들의 도시락’이라는 이름이 붙은 돼지고기 덮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금광이 번성하던 시절, 진과스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짧은 휴식 시간에 빠르게 먹던 식사에서 유래한 메뉴라고 하는군요.
돼지고기 덮밥에 절임 반찬 몇 가지를 얹은 단순한 구성이지만
투어 중 허기를 채우기엔 충분했습니다.
투어답게, 식사 시간도 길지 않네요.
마지막 코스는 지우펀입니다.
홍등이 켜진 야경으로 유명한 곳.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거의 분명합니다.
바로 이 한 장의 사진.
일명 ‘아메이 찻집’ 풍경입니다.
다들 이곳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됐던 곳이라 믿고 오거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아니라고 공식 부정을 했든 말든ㅎㅎ),
그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은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이곳에 옵니다.
요즘은 일본 관광객보다 한국 관광객이 더 많아 보일 정도입니다.
좁은 골목길을 한국어가 가득 찬 인파에 떠밀려 다니다 보니
이곳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의 배경이었던 장소라기보다,
드라마 ‘온 에어’와 ‘꽃보다 할배’에 등장했던 관광지로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갑자기 골목을 걷다 보니 올봄 교토에서 청수사에 갔다가 내려오던
니넨자카, 산넨자카 골목이 떠올랐습니다.
어쩐지 낯설지 않다 싶었는데, 관광지의 모습은 닮아가는 모양입니다.
지우펀에서는 비교적 시간이 넉넉했습니다.
약 두 시간.
먹거리나 살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라 비좁은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지우펀 대표 간식이라는 땅콩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봅니다.
하나를 사면 반으로 나눠주는데 생각보다 달지 않고 맛있네요.
(가이드 찬스로 200원 할인^^)
모든 일정을 마치고 종착지 시먼딩에 도착하니 저녁 8시.
오전 9시 30분에 시작했으니 꼬박 10시간 반을 움직인 셈입니다.
카톡 채팅을 중심으로 한 안내 덕분에
버스를 타고 내리는 순간부터 투어의 시작과 끝까지
한 치의 혼선도 없이 진행됐습니다.
예전의 가이드 투어와는 전혀 다른 방식.
더 효율적이고 더 정교해진 관광의 한 단면을 몸으로 체험한 하루였습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분명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글은 대만 가오슝 한달살기 중(2023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