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이 떨어지는 게 포인트
왜 냄비는 3종, 5종으로만 파는 걸까.
대형솥 겸용으로 쓰던 무거운 밥솥을 아버지께 드리고 수원으로 이사 온 날 이후부터 나는 마트며 백화점이며 찾아다니며 적절한 사이즈의 냄비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좀 괜찮나? 싶은 제품은 전부 3종, 5종으로만 묶어서 팔고 있는 것이다. 특정 사이즈만 사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진대 어찌 전부 묶음으로만 판단 말인가?
심지어 낱개로 사면 단가가 조금 비싸고 수준이 아니고 "이번 기회에 저렴하게 세트로 마련하세요"란 말뿐, 낱개로 사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둘러볼수록 내 의견이 처절히 묵살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정말 좋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니, 난 딱~ 하나만 사고 싶다니까?!
이 나라에 진정으로 "딱 하나의 완벽한 냄비"를 사고 싶은 나의 취향을 맞춰줄 판매처는 정녕 없는 것인가?
그런데 계속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나한테 그 사이즈의 냄비가 필요한가, 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큰 냄비란 자고로 회 먹고 3천 원에 서더리 추가해서 매운탕 끓일 때만 쓰이는 존재랄까?
평소에는 탕과 찜은 하지 않는다. 찌개나 국은 딱 한 번 먹을 양만 끓인다. 한 번 먹고 난 찌개와 국을 다음날엔 질려서 먹지 않았더니 상해버려서 싱크대에 붓는 짓을 다섯 번쯤 되풀이했을 즈음에 나는 나와 약속했다. 국과 찌개는 절대 1인분만 끓이겠노라고.
쇼핑 대 실패를 하고(하지만 미니멀리스트에게 쇼핑의 실패는 아주 큰일이 아니니 걱정은 않으셔도 된다) 집으로 돌아와 냄비를 넣어둔 하부장을 찬찬히 살펴보니 사실 나에게는 더 이상 그 사이즈의 냄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끓여 먹는 매운탕에 질려 안 먹은 지 이미 몇 년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3종세트 5종세트 구매가 싫었을 뿐인데 그 본질 자체에 의구심을 품게 되다니 철학적 깨달음이 따로 없었다.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기 전이었다면 분명 그 언제 쓸지 모를 딱 하나의 냄비를 위해 쓰지도 않을 수많은 냄비들을 <싸게 잘 샀다>는 상인의 말만 철떡 같이 믿으며 나의 소중한 공간에 차곡차곡 밀어 넣고 뽀오얀 먼지를 맞게 했으리라.
그렇게 내 안에서만 소란스러웠던 냄비 대 소동이 일어난 지 어언 3년, 나는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얼마 전에 중간사이즈 코팅냄비와 웍 바닥에 수많은 상처들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친구에게도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그래서 이제 나에게 남은 냄비는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녀석은 테팔의 매직핸즈제품 중 18cm 스테인리스스틸 제품이다. 역시 스테인리스!
매직핸즈는 본체와 손잡이가 분리가 되어 원래 목적은 프라이팬과 냄비를 손잡이의 방해 없이 차곡차곡 쌓아 보관할 수 있게 만든 제품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냄비도 하나, 프라이팬도 하나가 전부니 굳이 둘을 포개어서 보관하지는 않는다.
손잡이가 떨어지는 작은 스테인리스 냄비의 활약은 어마무시하다. 대부분의 시간은 한두 번 먹을 찌개나 국을 끓이는 냄비로 활약한다. 식탁 위에 냄비째 올려둔다 해도 손잡이를 떼어둘 수 있으니, 식사할 때 손잡이가 거슬리지 않아 제법 괜찮다.
그 외의 시간에는 물을 끓여낸다. 전기주전자를 쓸 때는 물을 끓이고 나면 전기포트의 물을 전부 비워 말리고 전기 콘센트를 정리하여 장 안에 들여놓고 했었는데, 냄비를 사용하니 그 번거로운 과정이 모두 사라졌다.
물만 깔끔하게 끓여낸 후 잔열이 남아있는 인덕션 위에 냄비를 올려두면 물기가 금세 말라 한 시간 이내로 하부장에 다시 냄비를 넣어둘 수 있다.
가끔은 나물을 데친 후 물기를 전부 따라버린 뒤 그 위에서 바로 기름, 간장, 깨를 뿌려 무치는 것도 가능하다.
스테인리스 재질이니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슥슥 저어도 안심이다. 데치는 과정 없이 작은 보울이 필요할 때도 대활약 가능이다.
그야말로 '일당백'은 이 냄비 같은 존재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니려나.
남들은 그런다. 시간이 지나면 살림살이가 자꾸 쌓인다고.
하지만 미니멀리스트는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르고 고른 것만 내 곁에 두고 있다고.
이 냄비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